제목 : [잡담] 퍼와도 되나 모르겠지만 일단 봐라 은공님글
글쓴이 : ㄴㄹㅇ
등록일 : 2009-06-16 00:49
조회수 : 60
이미 끊어놓은 표를 쥐고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른다. 결혼식 날잡고 구애인 못잊어서 고민하는 여자처럼 갈등했다. 내가 이 남자를 진정 사랑하는가. 공연갈 기분이 아니었다. 시국탓도 있겠지만 내 마음상태가 혼란스러웠다. 작년 이티피페스티벌 때는 공연이 너무너무 가고싶지만 집회를 가야하니까 1박2일 고민하다가 그냥 공연장에 눌러앉았는데. 이번엔 집회도 공연도 가기 싫었다. 두 가지 전부 나의 결정이 아닌 것 같았다.
영원한 우상...나의 진리
공연 전전날 오랜 태지팬 친구1에게 전화가 왔다. 이번 공연 표를 취소했다고 통보한다. 이번 노통서거 때 팬들간의 근조리본 논쟁을 보고, 서태지닷컴에서는 영결식날 선택해서 근조리본 달게 하는 거 보고 세트로 정나미 떨어졌단다. 서태지가 몸을 사리니까 팬들도 똑같이 그런 애들만 남았다고 일갈한다. 원래 자기 마음만큼 표현하는 거야. 태지는 정치적 각성이 없는 인물이야, 없는 게 나빠? 없어도 돼. 그냥 자기 있는 그대로 음악천재 외계인으로 행동하면 좋은데 자꾸 정치적인 의식 있는 척은 하니까 웃기는 거지. 저항정신이 죽었어. 나이들수록 눈치만 보잖아. 무슨 탄압을 받아? 도전이 어딨냐구. 진실하지 않아. 어색하고 불편해.
공연 전날 오랜 태지팬 친구2에게 문자가 왔다. 이티피때 쥐박이는 5년 내내 싸워야하니까 하루만 공연가자고 밤새 날 설득하던 그녀이건만 이번엔 경우가 달랐다. 공연갈 마음 싹 달아났다. 슬픔 추스리고 일하기도 힘들어. 태지는 너무 멀다..ㅠㅠ 그리곤 이렇게 말했다. 서태지는 동시대인은 아닌 거 같아. 그냥 뮤지션일 뿐이지
핏빛 용산...우윳빛깔 태지
태지공연에 같이 손잡고 갈 수 있는 친구들이 낙엽처럼 떨어진다. 자연의 일부처럼 변해가는 사랑을 어찌 탓하겠는가. 메가톤급 태풍이 한번 몰아치면 꽃대가 꺾이고 수목이 정리되고 바위산이 허물어지듯 인생사도 그렇다. 연애할 때 도란도란 지내던 남녀들도 가족의 테두리로 묶이면 서로의 생각의 속살을 확인하게 된다. 양가 부모님이 아프거나, 사업이나 주식으로 재산을 날리거나, 배우자가 바람을 피우거나, 암에 걸리거나 등등의 위기의 상황이 닥치면서 관계가 한번씩 정리된다.
사실 사건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사건에 대처하는 상대방의 태도를 통해 감춰진 본성과 면모를 알게 되면, 니가 그런 사람이었어? 그럴 줄 몰랐어 라면서 등 돌리는 것이다. 연애할 때라야 조건이 한정적이고 잘보이려 애쓰니까 둘만 좋으면 되니까 수영장에서 즐기는 셈이고 결혼은 망망대해에 둘이 떨궈지는 거다. 영원할 것만 같던 사랑의 금자탑은 예측불허의 천재지변으로 허물어진다. 생로병사처럼, 못말린다.
태지를 좋아하는 것도 그렇다. 그 전까진 좋았는데 여러 사건을 거치면서 공감불가를 이유로 이혼도장 쾅 찍을 수 있는 거다. 그럴 때마다 이별통보가 내게 내려지는 느낌이다. 내 청춘의 노른자위를 고스란히 동행한 그녀들이다. 내가 마치 태지랑 헤어지기라도 한 양 마음이 쓸쓸하고 헛헛하다. 우리 사이 공통분모가 떨어져나가는 거니까, 내 한쪽이 허물어지는 거지. 아프고 중심을 잃고 흔들릴 수밖에 없다.
뚫린 가슴 부여안고 뒤뚱뒤뚱 공연장엘 갔다. 올 스탠딩 공연이었다. 용산전쟁기념관. "전쟁을 뭘 기념하니." 전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스토리 때문에 역사공부를 싫어했다는 친구가 옆에서 투덜댄다. 공연장 안으로 입장했다. 입이 떡 벌어지는 천국같은 무대. 그리고 발 디딜 틈 없는 지옥같은 객석. 인권보호 공간인 사방 90센티미터는커녕 발 뒤꿈치를 들었다가 내리면 그 아래 다른 이의 발이 밟혔다. 12색 색연필의 색연필처럼 켜켜이 몸을 맞대고 서 있었다. 저 무대 위의 서태지를 볼 수 있을까 염려스러웠다. 역시나 팬들 머리통만 볼 수 있었다.
최악의 경제난...최고의 무대
최고의 무대를 고집하는 서태지. 티켓값이 비쌀 수밖에 없구나.... 으리으리 짱짱한 무대장치를 보면서 당장에 든 생각이다. 십삼만사천원. 서태지공연의 퀄리티를 볼 땐 적정가격이지만 2009년 경제지표를 감안했을 때 표값이 비쌌다. 아무리 비싸도 난 가겠지만. 하지만, 정말 가난한 팬들은 못가니까, 이번 활동은 가난한 팬은 철저히 소외됐으니까. 전국투어라도 조금 값을 현실적으로 내리면 안 될까 싶었다. 총체적 경제위기의 상황에 이삼십대 백수가 태반이고, 88만원 세대 비정규직들이 양산되고 서민경제가 죽어간다. 경향신문 18년차 기자가 지난달에 월급 120만원 받았다는데 그 기자의 딸이 있었다면 여기 오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시기에는 그냥 무대를 조금 소박하게 꾸며도 좋지 않았을까. 뮤지션 서태지의 역사는 늘 최고의 무대장치와 최고의 음향시절이었지만, 2009년에는 심한 불황이어서 무대의 규모가 예전같지 않았더라도, 그 또한 의미 있었을 것이다. 그치만 오로지 음악에 목숨거는 비타협적인 태지에게는 무리한 요구겠지 싶어 마음 접었다. 근데, 소박한 무대가 왜 나쁘지... 그는 어디서나 빛날 텐데.
시대유감...슬픈아픔
한동안 공연에 몰입하지 못했다. 자리가 너무 숨막혔고 나갈수도 없었다. 태지는 넓고 난 좁았다. 사람들은 키가 너무 컸고 난 작아졌다. 우윳빛깔 태지는 하얗고 떠밀리느라 분가루가 지워진 나는 칙칙했다. 웜홀 때 그렇게 혼을 다해 불러서 꼭 다시 듣고 싶었던 코마마저도 그냥 흘러갔다. 태지가 말한다. "여러분들 요즘 힘들었는데 이 노래로 많이 위안 받았다고 들었어요."라고. 그 말이 왜 그렇게 멀게 들리는 걸까.... 또 태지는 예상대로 시대유감을 부르더니, "한이 풀렸느냐"고 묻는다. 시대유감 한방으로 풀릴 한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이지 이번 공연에서는 시대유감을 듣고싶지 않았다. 이런 기분이 들까봐서다. 도대체 태지는 무엇을 시대유감이라고 생각할까. 생일축가처럼, 애국가처럼 공허하다.
서태지와 아이들 때 노래가 쏟아져나왔다. 하여가 데스메탈 버전은 최고였다. 감동이 복받쳤다. 널 지우려고 해, 제킬박사와 하이드. 슬픈아픔, 너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추억을 자극한다. 언제들어도 명곡. 신곡 2곡도 아련한 것이 설레고 좋았다. 편안하고 애잔하게 들렸다. 레플리카. 복제. 주체성을 상실하고 서로를 닮으며 애쓰는 우리모습을 돌아보고자 만들었단다. 주체성을 지키고 사는 태지는 노래를 부르고, 노예근성에 찌든 우리가 들어야할 노래다. 7시 30분부터 콩나물 시루에서 같이 공부했던 서태지와 우리, 사사건건 안된다고 말하는 사회 속에서 억압받았던 서태지와 우리였지만, 태지는 자유를 얻었고 우리는 그대로다...
공연이 끝나고 불꽃이 터졌다.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 쇼쇼쇼. 여기는 용산. 시대의 모순이 피 흘리는 곳. 한 맺힌 혼이 떠도는 곳. 돈 없는 게 죄였던 우리시대 가난한 아빠들 이상림, 이성수, 윤용현, 양회성, 한대성 씨가 아직도 냉동실에서 눈 감지 못하고 있다. 그분들의 시신이 백일 넘게 놓여 있는 이곳에서 불꽃이 미친듯이 터진다. 불꽃이 피눈물처럼 아프다. 그 분들, 장례비 걱정에 하루도 편히 잠들지 못했던 유가족들도 저 불꽃을 보셨을까. 만약 오세훈 서울시장이 무슨 축제를 한다고 용산에서 불꽃을 저 양으로 쏘았으면 난 아마도 욕을 해댔겠지. 태지는 뮤지션이지 동시대인은 아닌 거 같다.는 친구의 공연불참의 변이 도무지 어려워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런 뜻인가.
동시대인...외로운섬
난 동시대인 태지의 자유로움과 고귀한 정신성을 사랑하는데. 나에게 태지는 강자의 표상인데, 고귀한 이기주의의 표본인데 왜 이러지. 노무현 서거의 충격이 남아서 그런 거라고 말하기엔 난 노무현의 만배쯤 아니 오십만배쯤 태지를 사랑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에는 먹고 자면서 울었지만, 상상만으로도 서태지가 그런 일을 당했다면..거의 자식과 동급의 충격이다. 그런데, 그 마음이 다 가짜는 아니었을 텐데...난 태지의 공연에 열광하지 못했다. 난 공연장의 태지와 팬들과 동시대인이 아니다. 섬처럼 저만치 떨어져나갔다. 쓸쓸했다. 외로웠다. 섬. 그래. 내가 여기 있는 건 무슨 뜻일까.
태지가 사랑스러워보이지 않으니 괴롭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맞추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우숩게도 그의 머리끝이라도 보려고 안달했다. 뒤꿈치를 들고 목을 하도 뺐더니 온몸이 쑤신다. 이틀밤 뒤척였다.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태지는 그대로인데 어쩐지 내가 태지를 좋아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 된 거 같다. 이 기분 뭘까. 우윳빛깔 서태지를 바라보기엔 내 눈에 이물질이 잔뜩 끼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용산이 너무 슬프다. 빨갛게 충혈됐다. 유인촌 말대로, 세뇌당했나... 눈병 나을 때까지, 눈 감고 싶다. 눈이 너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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