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정혜진 (riceworm82@hanmail.net)
올린날짜: 2000/11/17 (02:25)
IP주소: 211.48.30.34 조회수: 4
대경성을 들을 때마다 나는 벌어진 입으로 새어 나오는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아... 서태지는 정녕 천재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원스럽고 귀에 잘 들리는 곡 구성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가사에 놀라고 또 기가 막히는 것이다.
들을 때마다 대단하고 새롭게 느껴지는 라임과 중의적 표현은 그의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대경성에 이르면 나는 아예 눈을 감아 버린다.
앨범 속지에 그려져 있는 눈 위에 앉아있는 부엉이... 그것은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아테네)의 어깨에 앉아 있다는 부엉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태지가 주문한 것은 아닐 것이나 전상일이 그것을 서태지를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했으리라 짐작해 본다. 선험적 직관이란 거, 이 시대에 서태지만큼 잘 어울리는 사람이 또 있을까.
대.경.성.
처음에는 조금 어리둥절했었다. 무슨 말인가 했다.
탱크, 오렌지, 울트라맨이야, ㄱ나니? 처럼 상징적이거나 장난스러운 제목이 아닌 묵직한 한자어.
무협지 제목이나 중국집 간판이 생각나는 이것이 하여가나 수시아와 같은 맥락으로 만들어진 것인가 싶었다.
그러다가 가사를 읽고는 대도시 서울을 말하는 거구나, 문명비판적인 뜻인가 보네, 했었다.
'미리 예측 못했던 일이 아니란 말이 쉽게 들렸던 거리'
--리~리~리~자로 끝나는 말은~, 이 생각나게 하는 가사는 '절묘'하다 싶을 정도였고
'절대 안돼 그건 미친 건배'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려버린 대한민국을 '미친 건배'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쳤으며
'도대체 정직한 듯한 정책 무가책 뒤를 쳤던 네 술책 너를 문책해도 결국 중책 맡은 자만 죄다 면책'
--그저 경악할 따름이었다. 저런 촌철살인 뒤에 check, check, check을 각운으로 쓸 수 있는 감각이라니...
어쨌든 후련하기는 하지만 다른 곡들에 비해 조금 단순한 맛이 있다는 정도로 생각했던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반복해서 들을 수록 점점더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숨겨진 코드가 아직도 많이 있을 것이라는 의심이 드는 것이었다.
그것은 영어가사를 알게되고부터 든 생각인데('No change, suck my brain'을 듣고 누구라도 전율하지 않았겠는가), 일단 제목부터 참 다의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대'경성. 서울의 옛이름 경성 앞에 큰 대자를 붙여 무리하게 비대해진 수도를 말하고 있다. 하지만 달리 해석하면 '대 김영삼 전대통령 각하'하는 식으로 가치가 없는 것의 앞에 부러 붙여 비아냥대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리고 대'경성'일 경우. 경성이란 단단한 성질이란 뜻이다. 그만큼 경직된 성질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문명이나 도시 비판이 아니라 경직된 문화, 관념 내지는 완고한 사람들과 꽉막힌 시스템 비판일 수 있다.
또한 남을 타일러 어리석음을 깨우치게 하는 '경성'일 수도 있고, '막막한 도전에 기권했던' 그 자신에 대한 '경성'-반성일 수도 있다.
마지막 해석은 '대경'성이다. '크게 놀라는(놀라운, 놀래키는)' 소리로 그는 세상에 경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 하나 더 있다. 경성은 경성지색, 곧 경국지색의 다른 말이다. 스스로 아름답다고 자찬하는 건가? 진정한 왕자병인가?
서태지... 너 대경성 맞아... ^^;;;)
-<*>대경성 가사를 룸싸롱 아가씨 버전으로 읽어보자 업소주인과 단속경찰 사이의 현실이 가슴아프게 다가온다<*>-
'막막한 재도전'. 나는 한동안 그것이 '제도전'이라고 생각했다. 시스템 내에서의 헤게모니 쟁탈에 질려서 그런 표현을 썼으리라 짐작했었다.
'넌 또 날 탓하겠지......'
신세대의 상징. 새로운 사조의 원인이자 결과였던 그는 '시초'로 추앙받은만큼 '원흉'으로 비난받았다. 그가 없던 세월, 발전없이 정체 혹은 타락한 대중가요가 그의 탓이라고 했다. 자신들이 지켜내지 못한 것을 만든 사람의 탓으로 돌린다. ......경복궁이 무너지면 대원군 책임인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창조해내지 못하면서 시도하지 못하면서 어쭙지않은 평론과 비판으로 가련한 쾌감에 몸을 떠는 불행한 무리들을 그가 몸소 상대하지 않는 것은 잘하는 일이다.
...견강부회인지 모르지만 서태지는 언제나 이렇게 해석의 여지를 남겨둔다. 친절하지 않은 것이지만 바로 그 불친절이 매력이다.
순진한 얼굴로 웃으면서 자기는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 아니니 곡해하지 말아달라고 하지만, '깡통같은 자식들, 내가 아무래도 그렇게 멍청할 것 같냐'고 비웃은 것도 그다. 그 자신의 이중성이 다양한 해석들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뭔가 다른 의도가 감춰져 있을 지도 모른다고 짐작하게 만드는 것이다. 얼핏 모순되어 보이는 그 이중성을 그는 아무런 갈등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다. 어차피 인생이란 모순된 경험들의 집합이 아닌가...
암튼 대경성... 정말 좋다...
- 정말 서태지는 최고 중 최고 인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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