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어머니의 셋째 아이이고 둘째 아들인 나는, 누나와 형과는 달리, 아버지 어머니가 결혼하고 신혼생활을 시작했던 서울이 아닌 부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신혼시절 아버지가 일산에 있는 우리상회라고 하는 종묘회사에서 근무하시고 어머니는 영등포여중에서 근무하실 때 누나가 태어났고, 그후 아버지가 전라남도 진도 농협 농장장으로 멀리서 혼자 자취하실 때 형이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후 아버지는 경상남도 김해군 대저면(현재 부산시 강서구 대저동)에 있는 중앙종묘 주식회사 연구농장으로 자리를 옮기셨고, 우리 가족은 내가 태어나기 5개월 전쯤 부산으로 이사하여 어머니는 부산진여상에서 근무하게 되셨습니다.
나는 1968년 9월 12일 오후 어머니가 부산진여상에서 퇴근하여 부산시 부산진구 전포동 집으로 돌아온 직후 아버지와 산파의 도움을 받아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어린 세 아이를 가진 우리 가족은 전셋집 주인의 심한 구박에 어쩔 수없이 경상남도 김해군 김해읍 삼정동 115-1번지 밭에 무허가 기와집을 짓고 이사하게 됩니다. 김해읍으로 통합되기 전 활천면이어서 활천이라고 불리는 그곳의 삼성국민학교 옆에 있던 우리 집과 농장은 지금의 삼정중학교 터와 거의 일치합니다.
내 기억 속 최초의 아버지 어머니는 그곳 삼정동 115-1번지 집과 농장에서부터 남아 있습니다. 그게 몇 살 때부터의 기억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내가 울산 아버지 본가에서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만나 뵈었던 기억이 생생한 것을 보면, 만3살 무렵부터의 기억인 것 같습니다.
기억 속에는 수많은 그 시절의 추억들이 남아있지만,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했던 가장 선명한 기억들은 김해 집 안방에서 밤늦게 함께 잠들기 전 그리고 새벽 일찍 함께 일어나서 했던 일들입니다. 어머니는 구포여중 교사시절 전국과학발명품경진대회에서 지금은 집집마다 부엌에 있는 씽크대와 비슷한 새마을개수대를 출품하여 대통령상을 받으셨고, 그 덕분에 대통령표창과 일본 시찰이라는 상을 받으셨습니다. 만4살 무렵이었을 때 부산 KBS방송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어머니를 TV에서 보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일본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신 어머니는 다양한 종류의 일본 장난감을 선물로 주셨고 오랫동안 재미있게 가지고 놀았었습니다. 그렇게 일본을 다녀오며 사다 주신 선물 중에는 일기장이 있었습니다. 밤마다 안방에서 잠들기 전이면 어머니와 함께 그 일기장에 일기를 썼습니다. 처음 1년 정도는 어머니가 내 대신 일기장에 일기를 써 주셨었죠. 그리고 나면 밤늦게 잠이 들지 않는 나를 위해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라디오를 밤새 켜 주셨습니다. 주로 기독교 방송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새벽이 되면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영어 독해나 회화 방송을 들으며 일어나 아침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국민학교 입학 전후 어머니가 우리 남매들에게 많은 경험을 시켜주기 위해 다양한 곳으로 데리고 다니셨던 일에 대한 기억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다양한 경기나 경시 대회에서 상을 받은 기억은 없지만 어머니를 따라서 많이 참가했던 기억은 생생합니다.
내가 국민학교 3학년이던 1977년 봄 우리 가족은 부산시 동래구 장전동으로 이사하였고, 1년 후 다시 온천동으로 이사하였습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할 무렵 아버지는 중앙종묘 주식회사 본사 연구농장으로 영전하여 서울로 혼자 올라가셨고, 서울 서초동 세종아파트 301호를 구입하여 그곳에서 사촌 창규형 가족 그리고 영규형과 함께 지내셨습니다. 중학교 1학년을 마치자 마자 나는 혼자 먼저 서울로 전학하여 서초동에서 아버지, 창규형 가족, 영규형과 함께 6개월 정도를 함께 살았습니다. 그 무렵 아버지와 단 둘이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야간열차를 함께 탈 일이 많았고 그러면서 아버지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과학자/기술자였습니다. 세상에 있는 사물이나 일어나는 일들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설명하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그런 만큼 어떤 문제를 해결하거나 해결하기 위한 결정을 하면서 선입견이나 개인적 감정보다 객관적인 분석이나 논리에 의지하는 분이셨습니다.
나에게 개인적으로 중요했던 아버지의 결정도 그러하였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학력고사를 치르고 시험결과에 대한 발표가 있고 나서 대학교 입시원서를 쓰기 1주일 전쯤 아버지와 나는 아버지 은사님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당시 대학입시제도는 오직 1개의 대학교 1개의 학과에만 지원할 수 있었고, 그 선발 기준으로 학력고사 점수에 내신등급 점수와 체력검사 점수를 합하고 대학별로 실시하는 논술고사 점수와 면접 점수까지 더한 것을 사용하였지만, 근본적으로 비중이 가장 큰 학력고사 점수로 당락이 결정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내 학력고사 점수는 서울대학교 어떤 학과에 지원해도 합격할 수 있는 것이어서 서울대학교에 간다는 것과 생명과학에 관심이 있다는 것 외에는 구체적으로 지원할 학과에 대한 결정은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학과에 입학하셨지만 그 이후 집안의 금전적 지원이 부족하여 휴학하여 돈을 벌기도 하는 등 고학으로 굶주리며 겨우 졸업을 하셨고, 그후 대학원에 진학하여 공부하는 대신 가족과 처갓집까지 먹여 살리기 위하여 평생 회사 연구소의 연구원/기술자/회사원으로서 회사에게 돈을 벌어줄 수 있는 연구만 하셨습니다. 한 때 아버지가 배추육종으로 크게 성공하여 업계 기술자 최초로 산업훈장도 받으시는 등 유명해지자 충남대학교 등에 있는 친구 교수들이 교수 초빙의사를 보였지만, 아버지는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아야 하고 집에 돈이 많이 필요했던 당시 상황 등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자식들 중 하나는 당신의 뒤를 이어 농학을 공부하여, 회사원이나 기술자가 아닌, 학자로서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어 주기를 바라셨습니다. 아버지는 학력고사 결과 발표 이후 나에게 자주 농과대학 농학과나 원예학과로 진학하는 것을 추천하셨고 나도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아버지의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아버지나 그 동창들은 수원농대라고 불렀죠) 시절 지도교수였던 은사님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서울대학교 농학과 시절 지도교수였던 분은 당시 은퇴하여 명예교수로 계시던 표현구 박사입니다. 아버지가 돈이 없어서 휴학하며 당시 우장춘 박사가 소장으로 있던 동래 원예시험장에서 일을 하다가 복학할 무렵, 표현구 교수는 미네소타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막 귀국하였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1970년대까지도 서울대학교 교수들조차 대부분 박사학위가 없었고, 그래서 서울대학교 창설에 깊숙이 관여한 미네소타대학교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교수들은 순차적으로 미국에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받게 됩니다. 표현구 교수는 당시 어렵게 고학하던 아버지의 재능과 성실함을 인정하여 유급조교를 시켜주었고, 그 덕분에 아버지는 서울대학교를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버지와 내가 방문한 표현구 교수의 자택은 이촌동에 위치한 한강이 잘 보이는 아파트였습니다. 표현구 교수는 선경그룹(현재 SK그룹) 창업자의 큰사위이며, 현재 SK그룹 회장의 큰고모부가 되는 분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표현구 교수에게 ‘아들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 보내고 싶은데 교수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표현구 교수는 아버지에게 ‘아들을 자네와 같은 기술자로 만들고 싶은가, 아니면 학자로 만들고 싶은가?’ 라고 되물었습니다.
아버지는 표현구 교수에게 ‘아들을 학자로 만들고 싶습니다.’ 라고 답했습니다.
표현구 교수는 아버지에게 ‘그렇다면 아들을 농과대학에 보내지 말게. 농과대학은 농업기술자를 양성하는 직업학교라네. 학자로 만들고 싶다면 옛날 문리대학(college of arts and sciences), 지금의 자연과학대학으로 보내야 하네.’ 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즉, 순수과학을 배우고 연구하는 자연과학대학이 아닌 다른 대학들은, 의과대학이 의료기술자를 양성하는 곳, 법과대학이 법률기술자를 양성하는 곳, 공과대학이 공업기술자를 양성하는 곳, 약학대학이 약사를 양성하는 곳, 사범대학이 교사를 양성하는 곳인 것처럼 모두다 전문기술자 양성 커리큘럼에 따라 배우고 익히는 기술자/직업인을 위한 학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방문 이후 아버지는 나에게 더 이상 농과대학 진학을 권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는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판단할 뿐 아니라 성실하게 실천하고 노력하는 분이었으며, 어머니와 함께 가족과 이웃과 사회를 위해 기여하고 희생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아버지는 50이 넘은 나이에도 머나먼 미국 땅에서 오랫동안 혼자 많은 일을 해내며 지내실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늘 자식들의 성공을 위해 숨어서 걱정하고 기도해 주셨다는 것을 너무도 많이 경험하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말씀을 많이 하지는 않으셨지만 큰 뜻과 깊은 마음을 너무나 많이 보여 주셨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감사합니다.
2022. 12. 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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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23-10-02 07: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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