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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배울 수 있는 사람
 작성자 : 주인
 홈 : 없음

오늘 오후 왠지 김교신 선생이나 노평구 선생의 글을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30 여년 전 청소년 시절 심심할 때마다 읽던 김교신전집을 그 후로는 다시 읽지 못했고, 
노평구 선생의 글도 성서연구 잡지가 종간된 후에 일부러 찾아 읽는 일이 흔ㅎ지는 
않았다. 오늘 인터넷에서 찾아본 아래 김교신 선생의 글은 원문과 번역본(?)의 두가지가 
있었는데 내게는 원문이 훨씬 더 친근하게 다가온다. 아마도 옛날에 대한 추억 
때문이리라.



배울 수 있는 사람

‘學而時習之不亦說乎’라는 句는 年少한 때에 들은 까닭인지는 모르나 실상 基督敎의 
요한복음 三章十六節보다도 더욱 외우기 쉽고 마음에 合致함을 느끼는 수가 있다. 
特히 基督敎界의 靈能이 있다는 信者, 高等程度란 것과 正統信條란 것을 자랑하는 
信者를 對할 때마다 우리는 基督敎에서 厭症이 생기고 儒敎를 向하야 無限히 憧憬하는 
마음이 닐어남을 깨닫는다. 子曰 十室之邑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라 하야 
안에 從心所欲不踰矩하는 域에 達함이 있고 밧ㄱ에 三千弟子의 따름이 있을지라도 
終生토록 배우고 또 배울 수있는 餘地가 남아 있었든 孔夫子의 海綿組織같이 부드럽고 
伸縮있는 그 胸襟이 限없이 그리워진다. 사람이 宗敎的 信仰을 所有하거나 或은 무슨 
思想의 根據될 만한 信念을 把持함은 可하다. 없기보다 낫다. 마는 이 信仰 或은 信念 
때문에 그 心情이 珪岩보다도 딴딴하게 硬化하야 다시 가르킴을 받을 수 없이 된다면 
이는 저에게 다시 곧힐 수 없는 固疾이 되고야 만다. 山猪膽을 먹은 後에는 다른 藥效가 
못난다 하거니와 信仰的 硬化病이 걸린 後에는 百藥이 無效다. 저는 靑少年 中에서 或時 
發見하는 唯物論者와 같이 未熟한만치 그만치 熱熱하다. 저의 眼中에는 長者도 없고, 
學者도 없고, 오직 正한 것은 自己뿐이오 貴한 것은 自己의 主張이오 强한 것은 自己의 
祈禱인 줄 確信한다. 故로 저가 他人의 信仰을 秤量할 때는 코로써 웃는다. 저의 눈에는 
골리앗이 이스라엘 軍隊를 向할 때와 같은 (삼上十七章) 必勝을 確信하는 怪光이 빛난다. 
저는 朝鮮 안에서 可히 許할 만한 基督信者를 헤아릴 때에 한 손가락 或은 두 가락까지 
굽힐 수 없음을 嘆하고 앉았다. 이 可恐할 信仰病의 蔓延을 보고 우리는 깊이 反省할 
것이다. 비록 天堂의 上座에 오르지 못할 지라도 아직 배울 수 있는 人間으로 살고저 한다. 
어느 部門의 學術이든지 어느 敎派의 主唱에든지 敢히 無用을 速斷치 말고 거긔서 배우고 
얻어서 살과 피를 만드는 者 되고저 所願이다. 우리가 講習會를 엶도 知識을 자랑하자는 
것이 안이오 서로 배우랴는 것이다. 聖朝誌도 또한 오늘도 배우고 來日도 배우랴는 者의 
途程의 記錄일 것 뿐이다. 博士 죤슨에게는 無用한 時間이 없었다 한다. 農夫에게나 
鐵工에게나 對하는 사람 接하는 物件을 다 先生으로 만들 수 있었다 하니, 願컨대 우리도 
限없이 부드럽고 謙虛한 마음을 가지고 배우고 또 배울수 있는 사람 되고저 한다.

聖書朝鮮 第59號 (1933年 12月)



(아래는 내가 직접 바꿔 본 현대식 문체)

배울 수 있는 사람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라는 구절은 
어린 시절에 익숙히 들은 까닭인지는 모르나 사실 기독교 
성서의 요한복음 3장 16절보다도 더욱 외우기 쉽고 마음에 
깊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는 수가 있다. 특히 기독교계에서 
영적 능력이 있다는 신자나 높고 정통한 경지의 신앙을 
자랑하는 신자를 만날 때마다 우리는 기독교에 대한 염증이 
생겨나고 반면 유교에 대한 무한한 동경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깨닫는다. 공자는 ‘열 집이 모여 사는 고을에 나만큼의 
충심과 신의를 가진 사람은 반드시 있겠지만 나만큼 배움을 
좋아하지는 못할 것이다’ 라고 할 정도로 배움을 즐겼다. 
안으로는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하여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는 
경지에 이르렀고 밖으로는 삼천 명의 제자들이 따랐음에도, 
그 생을 마칠 때까지 배우고 또 배울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었던 해면조직같이 부드럽고 신축성이 있는 공자의 그 
마음이 한없이 그리워진다. 사람은 종교적인 신앙을 가지거나 
혹은 어떤 사상의 근거가 되는 신념을 가질 수 있다. 그런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보다 가진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신앙이나 신념 때문에 그 마음이 바위처럼 단단하게 굳어
버려서 다시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면 이는 저에게 
다시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 되고야 만다. 산돼지의 쓸개를 
먹고난 후에는 다른 약은 효과가 없다고 하는 것처럼, 이렇게 
신앙적으로 굳어버린 경화증에 걸리고 나면 어떤 약도 효과가 
없다. 그런 신앙적 경화증에 걸린 자들은, 마치 젊은이들 중에 
어쩌다 나타나는 유물론적 좌파 사상에 빠진 자들처럼, 
미숙하지만 그만큼 열광적이다. 저들의 눈에는 나이든 어른도 
없고 많이 배운 학자도 없으니, 오로지 옳은 것은 자기뿐이고 
귀한 것은 자기의 주장뿐이고 강한 것은 자기의 기도뿐인 줄을 
확신한다. 그러므로 저들은 다른 사람의 신앙을 저울질하며 
코웃음으로 비웃는다. 저들의 눈에서는 이스라엘 군대를 향한 
골리앗과 같이 (사무엘서 상 17장) 필승을 확신하는 기이한 
빛이 난다. 저들은 나라 (조선) 안에서 제대로 된 기독교 신자를 
한 두 명도 찾을 수가 없다고 한탄하며 앉아 있다. 이런 무서운 
신앙의 병이 만연하는 것을 바라보며 우리는 깊이 반성해야 할 
것이다. 비록 천당의 높은 자리에 올라가지 못할 지라도 아직 
배울 수 있는 인간으로 살고자 한다. 어떤 분야의 학문이든지 
어떤 교파에서 주창하는 것이든지 감히 소용없다고 속단하지 
말고 거기서 배우고 얻어서 살과 피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자 
소원한다. 우리가 강습회를 열어 만나는 것도 지식을 
자랑하고자 함이 아니라 서로에게서 배우려는 것이다. 성서조선 
잡지도 또한 오늘도 배우고 내일도 배우려는 사람이 살아가는 
길을 기록하는 것일 뿐이다. 죤슨 박사에게는 소용없는 시간이 
없었다고 한다. 농부이거나 공장 노동자이거나 만나는 사람과 
접하는 물건 모두를 선생으로 삼아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원하건데 우리도 한없이 부드럽고 겸허한 마음을 가지고 배우고 
또 배울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성서조선 제59호 (1933년 12월)


date : 2010-01-28 12:4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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