想念들
나는 어린 시절 무척이나 엄격하셨던 외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자주 들으며 자랐읍니다.
‘우리나라에는 서양의 귀족교육에 못지않은 정말 훌륭한 가정교육의 전통이 있었다. 젖먹이 때부터 얼마나 철저한 가정교육을 시켰는지 모른다. 그러던 것이 오늘날은 깨끗이 사라져버렸다. 왜정시대와 6.25를 거치면서 이러한 전통은 사라지고, 돈과 출세가 다라는 XX의 세상이 되어버렸다.’
교육에 대한 가정의 책임, 즉 부모의 책임은 클수록 좋은 것입니다. 소위 출세했다는 부모 밑에 행복하지 못한 자녀가 많은 것을 볼 수 있읍니다. 어머니가 자주 하시던 말씀처럼, 젖먹이 때부터 남의 손에 맡겨 키우는 것은 자녀를 불행하게 만드는 첩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불가피했었다고 스스로 위로하는 부모도 있을 터이고, 또 땅을 치며 후회하는 부모도 있겠지요.
시키는 대로 가르쳐 주는 대로 따라하도록 주입하는 학원 같은 교육 시스템에서는 창의적인 아이가 나올 수 없읍니다. 최소한 기본을 가르쳐 주고 나머지는 알아서 해결하도록 내버려두고 그냥 지켜보며 같이 고민해 주는 것이 가장 좋은 교육일 것입니다. 스스로 결정하고 또 그 결과를 스스로 깨닫고 받아들이고 책임지는 자세 없이는 혼자서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지요.
나는 25년 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미국으로 유학을 간 이후, 군복무시절을 제외하고는, 최근까지 미국에서 살았읍니다.
중학교부터는 교과서를 사용하지만, 미국의 초등학교에는 (미국의 국어인) 영어든, 수학이든, 사회든, 어느 과목에도 교과서가 없읍니다. 그냥 담임선생님이나 담당 과목선생님이 직접 만들어 준 복사물로 수업을 하고 숙제도 하지요.
미국 초등학교에서 가르치는 수학은 참 쉽습니다. 진도도 너무 느린 것 같아 보입니다. 아이들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해결법을 찾아보라고만 하지 가르쳐 주는 것은 별로 없어 보이지요.
영어는 책만 무지하게 많이 읽게 합니다. 그리고는 읽은 것에 대해 생각해보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생각한 것을 써보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쓴 것을 다시 고쳐 쓰라고 합니다. 그렇게 쓴 글들을 모아서 책을 만들라고 합니다. 그렇게 직접 만든 책을 학급 친구와 학부모 모두에게 보여주는 퍼블리싱 파티를 크게 하면서 한 학기를 마치지요.
내가 대학을 다닐 때 갑자기 맞춤법통일안이 바뀌었읍니다. 어제는 ‘고마와’가 옳다고 하더니 오늘은 ‘고마워’가 옳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또 10여년이 지나니, 로마자표기법이 갑자기 바뀌었읍니다. 어제까지는 ‘Pusan’이 옳았는데 오늘은 ‘Busan’이 옳다고 합니다.
내가 미국에 처음 도착하였을 무렵, ‘harassment’라는 단어를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 지가 커다란 뉴스거리가 된 적이 있읍니다. 미국 공영방송에서 조사해서 보도한 것에 따르면, 미국인의 약 70%는 ‘허래스먼트’라고 말하고 약 30%는 ‘해리스먼트’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방송은, 교양인이 널리 사용하는 언어 사용법은 다 올바른 사용법이라고 하더군요.
어린 시절 어머니는 ‘촌지는 우리가 꼭 지켜야 할 전통의 미풍양속’이라고 자주 말씀하셨읍니다. 해마다 학년 말이 되면 부모님은 나에게 정성껏 준비한 선물(주로 먹는 것)을 들려 같이 담임선생님 댁으로 인사를 가셨지요.
미국의 학교에서는 학기말인 크리스마스 방학 직전과 여름 방학 직전이 되면 각 학급에 학생과 학부모가 다 모여 크게 파티를 합니다. 거기서 담임선생님, 보조선생님, 과목별선생님들에게 꽤 큰 액수의 현금이나 상품권을 촌지로 전달하지요.
부모가 자녀에게 직접 밥을 지어 먹이는 것은 모든 교육의 시작과도 같은 것입니다. 어머니는 초등학교 때부터, 내가 유학 가기 전, 대학 졸업 때까지 매일 도시락을 싸주셨지요.
미국의 학교에서는 저렴한 가격의 유상 급식을 합니다. 저소득층이 많이 사는 지역의 학교에서는 무상급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도시락을 싸오는 학생이 학교 급식을 먹는 학생보다 더 많지요.
미국 사람들은 아이들이 행복하게 자라도록 형제자매를 많이 만들어 주겠다는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우리 어머니도, 아이들이 자랄 때 이상적인 형제자매의 숫자가 4명 이상이라는 것을 아셨기에, 당시 가혹한 산아제한 인구정책의 피해를 감수하면서도 4명의 자녀를 낳으셨지요.
과거 산아제한에 대한 세뇌가 남아 있어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한국에서든 미국에서든 한국 사람들은 아이를 하나 혹은 둘만 낳아 행복(?)하게 자랄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다 해주겠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더군요.
그런데 그 ‘모든 것’ 중에 아이의 형제자매라는 것이 빠져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남이 대신 해주기를 바라는 것 같아 보입니다. 문득 학창시절 즐겨 읽던 노평구 선생의 글 중에서 이런 것이 생각나는군요.
“(산아제한으로 자식을) 둘, 셋(만) 낳아서 훌륭한 교육을? 무슨 교육인가? 사람을 죽이고 나만 살자는 교육인가?” [출처: 생명력의 저하 (성서연구 제93호, 1961년)]
학창시절은 좋은 글과 훌륭한 스승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는 시기입니다. 나쁜 글과 그릇된 어른들로 인하여 많은 것을 잃을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모가 가장 중요한 스승이 되어야 할 때입니다.
(1학년 5반 학부모, 이대부중 소식지 5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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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14-04-24 19:3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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