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 교회 설교의 제목이 예전 게시판에 요약해서 올렸던 설교와 같은 것이라 잠시 예전 게시판에 있던 글을 찾아 보니, 4 년 전의 일이었군요. 맨 아래에 예전 게시판의 글을 다시 옮겨 봅니다. 해마다 추수감사절 무렵이면, 미국내 여러 교단들이 공동으로 권하는 설교 제목이라고 하는군요.
요즘 사노라면, 사람이 얼마나 이기적으로 자기만 생각하는 존재인가를 자주 느끼게 됩니다. 사소한 것에가 아니라 큰 것에도 감사할 줄 모르며, 남의 호의와 진심을 자기 마음 대로 자기 편한 대로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해석하고 오해하여 무시하고 짜증내고 분노하는 그런 것이 인간의 본성이란 사실을 깨달으며 살아가게 됩니다.
지난 주일의 설교 요지는 4 년 전이나 대동소이하겠지만, 또다른 것이 오늘의 시국인지라 그 중 기억나는 내용만을 아래에 요약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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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略)
오늘 날 미국은 전세계의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말았읍니다. 소위 전세계 모든 나라의 국민총생산 보다도 더 크다던 뉴욕 금융시장의 가치가 하루 아침에 1/10 로 폭락해 버리고 나니, 미국 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전세계의 사람들이 모두다 못살겠다고 야단을 하고 있읍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미국 경제의 70%가 미국민들의 소비를 위한 산업입니다. 즉, 미국 사람들은 전세계로 부터 좋은 물건을 싸게 사서 넘치게 쓰면서 풍요롭게 살아왔고, 마찬가지로 전세계 사람들도 미국에 물건을 내다 팔 수 있었기에 풍요롭게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은 이렇게 미국을 위해 봉사해 온 다른 나라들에게 감사하기보다는 자신의 힘만을 믿고서 으스대기만 해 왔고, 다른 나라들은 그동안 미국에게 감사하기는 커녕 오히려 미국이 망했으면 좋겠다고 질시해 왔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사람 사는 세상의 이치인 것 같습니다.
(中略) 나는 교회에 오기 위해 버스를 타고 할렘거리를 지나 오는데,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버스를 타고 내리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런데 내가 참 이상하다고 느끼는 것은, 그들을 위해 오래 동안 버스를 정차하고, 휠체어 승강기를 조작하고, 안전벨트를 부착해 주는 운전수에게나, 그리고 그것을 오래 동안 아무 말없이 기다려 주는 많은 승객들에게, 그들 장애인이 감사해 하거나 미안해 하는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의 불만과 불평으로 가득찬 언행만을 보게 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들은 장애인을 위해 이렇게도 잘 해주는 좋은 나라에 자신들이 태어났다는 것을 알지도 감사하지도 못하는 것 같습니다.
(中略)
인간이란 한치 앞의 미래도 알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항상 기도할 수밖에는 없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 주시고 또 이루어 주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정녕 우리가 원하는 것인지도 알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예전에 우리 교회에 늦도록 결혼을 못하고 계신 분이 있었읍니다. 나는 그 분이 빨리 결혼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를 했었읍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분이 여자 문제로 구설에 오르고 고생하게 되는 것을 보았읍니다. 나는 오래전 부터 조국을 위해 기도해 왔고, 근래에는 미국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있읍니다. 나는 조국이 통일 되어야만 한다고 믿기에 조국이 하루속히 통일 되도록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 왔읍니다. 그런데 지나고 나서 보니, 잘못하면 조국은 적화통일이 되어 버릴지도 모르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읍니다.
비로소 나는 더이상 내가 원하는 것을 해 달라고 기도해서는 안되는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읍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의 善이 이루어지도록 해달라고 기도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렇게 무엇을 원하는 지도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이 인간일진데, 어찌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 하나 하나에 감사하지 않고서 살 수가 있겠읍니까. 감사하는 삶이 바로 기독교인의 삶인 것입니다.
(下略)
(2008 년 11 월 16 일 뉴욕 고려교회 한영숙 목사 설교 중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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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는 사람 (누가복음 17:11-19)
어느 날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나병환자 열 명을 만나게 됩니다. 문둥병은 전염병이며 당시로서는 불치의 병이기도 했읍니다. 나병환자들은 일반인들과 함께 살수가 없었읍니다. 마을 밖의 계곡 같은 곳에 격리되어 살았고, 주변에 사람이 나타나면 '부정하다, 부정하다' 는 말로 큰 소리를 쳐서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고 피하게 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문둥이 열 명이 멀리 서서 예수를 향해 소리 질렀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소리를 들으신 예수께서는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고 하셨습니다. 병의 나음을 진단하는 것은 제사장들의 역할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의 말을 듣고 가다가 병이 나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하나가 자기의 병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서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이 무시하던 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의 감사를 받으신 예수께서는 물어보셨습니다. "열 사람이 모두 나음을 받지 않았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라고 하시며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두 가지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첫째는 불치의 병에서 나음을 받은 아홉 명이 감사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은 비정상적으로 보입니다. 둘째는 감사하러 온 사람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병 나은 것이 구원이 아니라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문둥병이 나은 것이 구원이 아니라면 또 다른 무엇이 있다는 것인지 이상합니다.
병 나은 사람들이 모두 감사하는 것이 정상적인 것 같은데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이들에게는 감사하는 일보다는 병 나은 사람으로 인정받는 일이 더 급했던 것 같습니다. 감사하기보다는 자기 소원이 앞서고, 자기 욕심이 앞서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이나 나, 모두가 그러합니다.
내가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던 20년도 훨씬 넘은 예전에, 나를 포함하여 한국에 있는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다는 사람들은 정의의 신학이다, 민중 신학이다, 해방 신학이다 하면서 소리를 높이며 학생들을 그렇게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내가 미국으로 유학을 오게 되면서 미국의 교단으로 부터 큰 액수의 장학금을 받게 되었고, 그 때문에 나는 미국 교단에게 감사의 편지를 쓰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말에 나는 어떻게 그 돈이 미국 교단의 돈이냐, 한국 교회에서 나온거나 마찬가지가 아니냐, 당연한 것에 왜 감사의 편지를 써야 하느냐 라고 말했던,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의 내가 정말 부끄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실 인간은 감사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감사할 것이 그렇게 많은 데도 감사를 못합니다. 절대적인 감사는 커녕 상대적인 감사도 못합니다. 즉 아무것이 없어도 무조건적인 감사를 드려야 하는 것이 인간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그러나 이런 감사는 커녕 모든 것에 부유하고 풍족해도 감사를 못합니다. 오히려 가지면 가질수록 불만이 더 많고 원망과 불평이 더 많아집니다. 부자들 중에 더 가난하고 불쌍한 존재들이 많습니다. 욕심 때문에 인간은 감사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고난 중에서 감사하기가 오히려 더 쉽습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어디에도 도움의 손길이 없을 때 인간은 그의 삶, 그의 생명 있음, 그 자체를 기적으로 여기게 되고, 그 기적을 하나님의 은혜로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삶을 기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경험하는 사람은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삶의 매 순간을 하나님의 은혜로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더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척도는 감사라는 말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사람들의 삶의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다' 라는 말은 다른 말이 아니라, '감사하는 사람이다' 는 뜻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감사가 있을 때 우리는 참 구원에 이른 것이라' 고 해야합니다. 예수께서는 문둥병이 나은 것을 구원 얻은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열 명이 모두 고침을 받았으나 구원을 받은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 하나 뿐이었습니다. 다른 아홉 명은 병이 나았지만 그들이 병들었을 때나 나음을 받았을 때에나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말입니다. 병이 나았지만 그들의 삶이 여전히 불만과 불평, 불안과 공포 속에 있다면 말입니다. 남과 비교해서 자신이 못났다고 느끼며,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공포에 휩싸이고, 기쁨이 없고, 감사가 없는 삶을 산다면, 성한 몸이 되었다고 그들의 삶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은 없습니다. 궁궐 속에서 호화로이 사는 사람도 그의 삶에 감사의 기쁨이 없다면 문둥병자인 저들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참 구원은 우리가 어떤 형편에 처해 있더라도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은혜로 경험하며, 그 은혜에 감격하여, 우리의 입술에 감사의 찬양이 넘치며, 우리의 영혼이 감사의 기쁨으로 충만할 때, 하나님으로 인해서 우리 영혼이 기쁠 때, 우리는 구원 받은 자들입니다.
감사함이 없이는 인간의 모든 관계가 올바르게 형성될 수 없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뿐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역시 감사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온전하게 형성됩니다. 감사하기 전까지 모든 관계는 갈등과 대립을 피할 수 없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창조주와 맞서려는 저항과 불신이 저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다' 는 영혼의 고백입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감사의 상태가 구원 받은 상태입니다. 우리에게 감사함을 넘치게 하사, 구원의 확신 속에 거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내게 충만하기를 원합니다.
(2004 년 10 월 10 일 뉴욕 고려교회 한영숙 목사 설교 중에서 옮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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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8-11-20 13:5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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