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같은 놈."
그렇지. 더욱더 증오해. 그리고 깨져버려. 킬러는 그 말에 동조하며 퍼렇게 번뜩이는 두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그 울부짖음을 경청하고 있었다. 두 손을 각기 다른 소매에 마주 넣은 채 유유히 고개도 끄덕여본다. 애초에 녀석들은 그런 식으로 서서히 파멸해가면 되는 거였다. 킬러는 조용히 속삭이며 자신이 깔아놓은 복선을 타고 움직이는 무대의 주인공들을 흘끗 훔쳐본다. 제 3자의 눈으로써 즐겨보고 있는 관할자로서 이보다 더한 짜릿함은 있을 수 없었다. 킬러는 자신을 등진 채 곧게 서 있는 메마른 몸매의 남자를 시야의 중심축으로 세웠다. 그 남자를 제외한 모든 것이 킬러에게 있어 자욱한 안개로 꽉 들어차졌다. 언제부턴가 킬러에게 있어 삶이란, 그저 단순에 지나친 타인과 타인사이에 노출된 모노크롬이 연결고리였다. 물론 남몰래 드러내지 않도록 유의한 비밀 한 두 가지쯤은 킬러도 지니고 있었다.
지금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흉흉하게 킬러를 노려보는 유스타스 키드라는 녀석과, 그런 녀석을 구두창으로 차 버린 트라팔가 로우. 이렇게 세 사람을 유일이 이어주는 사태의 전말의 진상은 킬러밖에 알 지 못했다.
"믿은 내가 멍청했지, 하……. 하긴, 애초에 너란 녀석과 나란 놈은 질긴 악연 이였지. 새삼스럽지만 다시 옛날로 돌아간다 생각하면 돼. 안 그런가? 유스타스 키드여."
“웃기지마. 누구 마음대로 끝내려고.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결단코 거짓말은 안 해. 오히려 가증스럽게 웃는 네 녀석 쪽이야말로 거짓말만 해댔잖아! 그리고 그 녀석이랑 나는 단순한 소꿉친구다.”
“헤에. 너에게 있어 ‘친구’라는 개념은 침대에서 구르기 편한 존재인가 보군.”
정작 당사자들조차 모르고 있는 전후시말을 전혀 연관성 없는 자신만이 소유하고 있다는 독점욕에 킬러는 온 몸에 전율을 느꼈다. 아아, 이런 식으로 저 트라팔가 로우도 가질 수 있다면 추잡스러운 눈초리정도야 거뜬히 받아낼 수 있어. 언제나 로우라는 남자의 두 눈과 두 손과 전라를 담고 있던 저 역한 홍색이 오늘따라 킬러를 즐겁게 해준다. 그렇게 역겨워마지않던 맹렬한 역정마저도 달갑게 느끼고 있다. 이 모든 상황과 연출 하나가 단아한 체구에 블론드 색을 지닌 남자의 뒷손에 걸러진 작품 이였다.
“합성이라고! 딱 봐도 모르겠냐?! 내가 그럴 리 없잖아!”
“진짜 실망이군. 자신의 잘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려고까지 하다니. 한 때 내가 네 녀석의 애인이었다는 사실이 끔찍해지려고 한다.”
“시발. 지금도 앞으로도 넌 내 거니까 그리 알아둬. 멋대로 끝내지마.”
가등의 조명에 의해 더욱이 두드러지는 금발머리칼의 킬러는 여전히 차오르는 숨을 거누지 못 한 채 가쁘고 거칠게 몰아쉬는 로우의 곁으로 발을 떼어냈다. 찬찬히 그에게 가까이 옮길수록 진해지는 야릇한 이향이 킬러의 허기를 갈구하는 듯 했다. 생전 처음 맡아 본 향에 호기심이 일은 모양인지, 침을 크게 삼키며 바짝 남자의 뒤로 다가선다. 그러고는 얄팍한 어깨를 감싸고 있는 검은색의 후드 너머로 언뜻 보이는 창백함에 조소를 기하곤, 허리를 굽혀 진한 기운을 맡는다.
여명에 깊게 가라앉은 군청색의 흐트러진 잔머리가 촉촉이 젖은 담갈색에 얇은 목덜미로 찰싹 달라붙어있다. 그 모습이 금빛으로 드리워진 남자의 보이지 않는 눈동자에 칙칙함으로 변질되어 일렁인다. 남자에게서 맡아지는 땀 냄새가 묘하게도 킬러에겐 좋았다. 그래서 그럴까, 당장에 로우를 끌어안고픈 욕구가 킬러의 마음속을 자극시킨다.
애써 몇 개월을 거쳐 준비해둔 시나리오를 허망하게 파투 낼 수 없다는 이성의 끈이 그를 간신히 억눌러준다.
“이쯤하고 돌아가자, 로우. 키드랑 보니가 소꿉친구 사실이란 건 사실이야.”
“....... 그쯤은 나도 알고 있었어.”
낮게 가라앉은 로우의 목소리가 그의 기분이 침체되어있음을 두드러지게 나타낸다. 표정도 좋고, 대사도 좋고. 그런 완벽함에 킬러는 새삼스럽지만 치밀고도 철저한 자신의 본성에 희열이 넘쳐났다. 트라팔가 로우. 이제 조금만 참으면 너는 내 것이 될 테고, 이런 무익적인 고민으로 아파하지 않아도 돼. 어디선가 음흉하게 이기죽거리는 음성이 킬러의 머릿속을 울린다. 그러나 그와 상반되게 자신보다 작은 남자의 떨고 있는 어깨를 부드럽게 쓸며 나긋한 목소리로 위로를 가한다. 어지럽게 두 겹으로 중첩되는 이중성에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양심에 현기증을 느낀다. 하지만 이미 돌이키기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여기까지 완성 된 모든 것들을 조롱했던 키드의 언행들이였다.
킬러는 언제나 물러난 채 새내기 생활에 시간이 멈추어있었다.
심장이 멎기 시작한 것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호감을 샀던 트라팔가 로우라는 남자의 연애 사의 고민을 들어주기 시작했던 올 해 5월 경, 단 둘만의 첫 술자리.
‘킬러여. 나 애인 생겼어. 유스타스 키드라고.’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라는 것을 절실히 실감한 킬러였다. 그런 감각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을 정도로.
킬러는 하루 종일 자신에게 붙어있던 로우의 존재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당연하단 듯이 강의실에 가면 언제나 그가 먼저 와 자리를 맡고 있었고, 당연하단 듯이 강의가 끝나면 점심 먹으러 가자며 그가 먼저 재촉하고는 손목을 끌어당겼고, 당연하단 듯이 하루 일과가 파하면 집은 정 반대 방향이었지만 늦은 시각까지 교내의 어딘가에 자리 잡아 수다를 떨거나 과제를 하거나 하는 일상의 무한 루트였다.
“킬러, 떨어져라. 뻔뻔한 새끼. 당장 어깨에 올린 손도 내려. 부러뜨리기 전에.”
킬러는 그 말 한마디에 곧 가볍게 곁눈질하며 슬며시 키드를 바라본다. 그러고 이내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그렇게 소중했으면 등한시하지 말았어야지, 안 그래? 라는 식으로 한껏 비꼬아준다. 허여멀건 녀석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가며 새벽 어스름 속에 뒤섞여 우스꽝스러운 색을 담는다.
그래, 이건 자신에게 건 내는 조언이나 다름이 없다며 씁쓸해하는 킬러였다.
“킬러여. 이 사진 원본도 가지고 있어?”
“아마. 하드디스크 안에 아직 있을껄.”
그럼 흔적도 남김없이 다 지워 줘. 로우는 자신의 어깨에 올려져있던 무거운 관심을 손으로 떼어내며 고개를 돌려 킬러와 시선을 맞춘다. 잿빛 눈동자의 올곧음에 소름이 끼쳤다. 정작 로우에게서 까발려지고 있는 것은 긴 분홍색의 장발을 가진 여자와 그 위에 올라타고 풍만하게 부풀어 오른 젖가슴을 만지고 있는 붉은 머리 남자의 성교 사진 이였다. 살 갗 위에 천 조각 하나 걸치지 않은 피사체의 교합은 마치 미술시간에나 접할법한 구도였다. 대놓고 드러낸 모습이 마치 야한 사진과도 같아 민망함을 자아낸다. 하지만 이미 볼 거 다 본 사이라서 그러한지, 트라팔가 로우는 딱히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단지 마음에 켕기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단 한 가지뿐.
여성의 굴곡 있는 나체.
유스타스 키드라는 남자를 자신과 달리 손쉽게 홀릴 수 있는 매료적인 몸태. 자신과도 같이 동성이 아닌 전혀 별개의 이성.
“...이정도로만 끝내도 괜찮은 거야?”
“그래. 그리고 평생 얼굴 볼 일이 없었으면 더 좋겠지.”
“같은 강의인데 어떻게 참으려고. 내가 손봐줄까?”
“됐어. 괜찮아. 신경써줘서 고마워.”
로우는 엄지와 검지에 추잡한 육색으로 현상된 인화지를 살짝 집어 올렸다. 마치 더러운 것이 제 손에 닿았다는 듯이 얼굴이 한 없이 구겨진다.
“그런 쓰레기 그만 보고 이리와. 진짜 네 녀석 사지를 비틀어 버리기 전에.”
“키드여. 새로운 여친한텐 승질 좀 작작 내고 잘해줘라. 안그러면 또 지금처럼 거하게 차일테니까 말야."
"좋아. 지금까지 장난은 애교로 봐줄테니까 닥쳐."
허탈하게 새어나오는 비소를 띄우며 트라팔가 로우는 진지한 태도로 키드를 바라보았다. 거짓말 아냐. 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양 손으로 사진의 모서리를 거칠게 흔들리는 눈동자와 달리 재지 않은 동작으로 집었다. 어차피 언젠가 끝나버릴 관계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나쁘게 헤어질 줄은 몰랐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인간과의 관계가 아닐까라는 탄식어린 고심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로우의 머리속을 어지럽혔다.
"그리고 이 사진은 찢어서 대신 버려줄테니 그리 알고, 몸 조리 잘해라."
그저, 빨리 집으로 돌아가 불빛하나 새어들어 오지 않는 캄캄한 방 안 침대에 누워 죽은 듯이 잠 만 자고 싶다는 심경뿐이였다. 지쳐간다.
순간의 열정에 휘둘림만 당하는 불운한 내 청춘이여! 갈기갈기 내 기억 속에서 그 부분만을 찢어내버리고 싶었다. 그래도 한 때의 우리가 했던 말 들중에선 진심도 여럿 포함되어 있었겠지. 너도 그러했겠지 나처럼. 만약에, 불에 띄어드는 나방마냥 한철만으로 그치는 열병에 지나지않는다면 이제 나 자신도 모르겠다. 킬러도, 키드도, 그리고 나 자신도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것인지 담아내지 못하겠다. 더이상 모르겠다. 내 자신이 자신이 아닌 것 같다. 트라팔가 로우라는 녀석에게 있어 유스타스 키드라는 남자는 유일히 마주볼 수 잇는 상대였다. 자신을 끔찍히 아껴주다 못 해 손 끝하나 대지 못하고 이런식으로 뒷통수를 치는 킬러와는 달랐다.
그래, 잡아먹지 못 해 안달나던 우리였다.
언제나 녀석의 자취방에서 부엌이던, 침실이던, 욕실이던간에 날을 세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그런 횟수가 잦아지면 잦아질수록 내 자신에 대해 더욱더 알아갈 수 있었다. 나 자신도 모르던 나 자신을 찾아낼 수 있었다. 어느 부위에서 성적 쾌감을 느끼는지조차 이젠 알고 있었다. 그런 세밀한 면까지 나 자신을 속속히 들춰내는 거북스러운 키드였다. 하지만 로우는 의외로 금방 질릴 줄 알았던 감정은 날이 갈 수록 깊이가 심화되어가기만 했다.
"킬러여."
"?"
"내가 한 번 대주면 우리의 관계도 끝내는거야."
"어?"
트라팔가 로우는 자신을 어정쩡하게 바라보는 두 남자의 시선을 거뜬히 받아들이며 사진을 쫙쫙 찢어내기 시작했다. 그래, 이렇게 속 시원하게 찢어발겨야 제 맛이지.
"끝내줘, 라는게 아냐. 끝내는 거지."
우정과 사랑 둘 다 끝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바에야 자신이 사라지는게 낫다고 판단한 로우였다. 사실 킬러녀석의 감정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단지 녀석을 친구 이상으로 볼 수 없었고, 유스타스 키드밖에 보이지않던 자신이였기에 애써 무시했었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 킬러가 자신과 키드의 관계를 악화시켜 사랑을 손에 넣으려고 할 줄은 몰랐다. 아직 앞 날 창창한 두 청년을 망치기에는, 간이 크지 않은 로우였다.
욱씬거리는 심장은 오늘에 있기까지 매일 앓아온 고통에 익숙해져있었나보다. 안이하게 미소를 지으며 자못 능숙히 속마음을 감출 수 있었다.
"그만 끝내자. 우리 셋 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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