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차 샀다."
씨익. 평소의 말수 적던 녀석과는 상당히 다른 너스레 한 웃음소리에 그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함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새로운 '차'를 샀다는 것에 즐거워하고 있다고 하기에는 무언가 나를 향해서 반짝이는 두 눈이 지나치게도 기대감에 충만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분명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로 인해서 이중적인 의의가 내포되어있음을 알 수 있었다.
녀석의 단순함에 피식 실없이 새어나오는 숨을 조용히 내쉬며 고개를 두어 번 끄덕여주었다. 이럴 때에는 어떤 반응을 보여줘야 저 녀석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을지 감이 잘 오지 않는다. 그저 흐릿한 시선에 녀석의 말간 미소를 지그시 바라보며 감정에 서투른 내 자신을 책망할 수밖에 없었다. 다양하게 떠오르는 무수한 단어들은 자존심이라는 필터를 거쳐 가시 돋친 불평만을 늘어놓으며 언쟁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럴까.
언제부턴가 스스로의 입을 닫기 시작한 것은 그러한 자잘한 연유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붉은 색으로 흐리멍덩하던 시야를 곧바로 잡으며 녀석과의 시선을 맞추었다. 그런 내 모습에 녀석이 눈앞에서 자신의 왼쪽 손을 빠르게 흔들며 의식의 존재를 확인시켜준다.
제대로 보고 있으니까 말해. 입으로만 뻐끔거리고 직접적으로 내뱉지 않은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알아들은 것인지 죽은듯한 검은색의 입 꼬리가 슬며시 위로 올라간다. 목을 울리지 않는 언어라 할지라도 대충 감으로 잡아채는 덕분에 녀석과 나 사이의 대화란 일반통행의 연속이었을 뿐이었다.
"오늘 바다로 드라이브 가자"
“......”
“트라팔가. 갈 거지?”
거부권의 유무에 대해 물어보았자 어차피 돌아오는 대답은 매한가지였기에 조용히 눈을 깜빡이며 응수해주었다. 딱히 오늘 일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무덥게 내리쬐는 햇볕에 타들어갈 것만 같았기에 바다가 보고 싶었던 참이었긴 했다.
차가운 물결에 가만히 몸을 내맡긴 채, 조용히 나를 감싸며 너울거리는 바닷물의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싶다. 아아, 그러고 보니 오늘 날짜가 어떻게 되더라. 급작스레 생겨난 궁금증을 참지 못 하고 어딘가에 들어있을지도 모르는 손목시계를 향해 손을 천천히 움직여 보았다. 지친 심신을 노곤하게 풀기 전에 적어도 밀린 일은 없는지 또는 잊은 약속은 없는지 하루를 확인해봐야 마음이 놓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위에 나른해진 탓일까?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 더딘 손길이 꽉 끼는 스키니 진의 좁은 주머니로 쉽사리 들어가지지 않았다.
“7월 3일.”
부지런히 움직이던 것도 멈춘 채 조용히 귀를 기울이며 그 낮은 울림을 귀로 받아들였다.
“7월이야, 오늘.”
“...벌써 그렇게 됐나.”
“어. ”
아아 그런가. 어느새 좁은 공간에서 빠져나와 서늘하게 식은 시계로 시선을 돌려보니 날짜는 녀석의 말마따나 7월 달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 동안 창밖으로 비쳐지며 균열 적으로 변해가던 낮과 밤의 하늘색만을 인식한 채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나오지 않는 동안 유일하게 사람과의 소통은 청각으로만 했었고 시각은 오직 사물만을 향해 바삐 움직였었다.
그리고 약 3개월 만에 처음으로 방 바깥에 나온 날이 오늘이었고, 처음으로 사람을 만난 날도 오늘이 되는 셈이었다. 그래봤자 다른 방이었지만.
왜 나오지 않았는가에 대한 것은 정확하게 집어보자면 꽤나 장문이 될 것이기에 이쯤 해두기로 하자. 그런 건 이미 내 머릿속에서도 지우기 위해 긴 시간을 할애해가며 무고한 노력을 감수했기 때문이었다. 실질적으로 나 자신도 요 최근의 모든 일들은 떠오르고 싶지도 않고 추억으로 남겨둘 만한 일도 없었다.
휴일에조차 침대 위에 누운 채 무심한 눈빛으로 집 안에 굴러다니고 있던 소설책을 훑어보기만 했을 뿐이다. 그것이 주말이든 간에, 평일이든 간에 상관치 않고 의미도 없이 흐르는 시간을 창문으로 내다보며 어림잡아 재고 있었다.
사람의 사람과 사람에 관한 사회 속에서의 형편없었던 ‘나’의 정의들은 이미 한 치의 흔적도 없이 삭아서 없어진지 오래되었다. 마치 나뭇가지의 줄기처럼 이리저리 뻗쳐 상호 작용으로 형성되어져 있･었･던 개인적인 심리들도 마음 속 그 어느 곳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지금 나에게 남아있는 것이 있다면 단 하나, 기분 나쁠 정도로 밝은 태양빛을 머금은 녀석의 머리칼과 눈동자와 그 조소만이 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데이트 하자는 건가, 유스타스여."
"음식에 데이트를 비유하자면 전채 코스 요리의 주 메인이고"
"……뻔뻔하네."
"그 후의 디저트 타임이 너라고 봐야겠지."
"개새끼. 좆까"
차가운 푸른 끼가 내려앉으며 굳어가는 녀석의 핏기 하나 없는 서늘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너란 녀석은 이런 상황에서마저도 담담한 표정으로 내 속 마음을 뜯어 먹을 수 있는 것인지 알고 싶다. 아니 알고 싶지 않다는 말이 더욱더 정확하게 들어맞을 것이다.
조금 말문을 튼 것으로 텁텁해진 입 안 구석구석을 혓바닥으로 쓸자 사방에 비릿한 혈액이 아릿한 통증을 동반하며 침과 함께 고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썩은 내가 진동할 것만 같은 역겨운 덩어리는 흑적색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녀석의 손길이 남겨놓은 자국이었다. 내 몸 어디에선가 새어나와 현실을 납득시켜주는 유스타스 키드의 역량에 그저 거슬리는 감탄사만이 숨에서 터져 나왔다.
이것 봐, 알고 싶지 않은데 결국 알게 해주잖아?
네 녀석이 왜 자동차를 샀는지, 그것을 왜 나에게 말했는지, 앞으로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지 전부 모든 것들이 알려주고 있지 않느냐 이 말이다.그래서 해선 안 될 말들과 함께, 나가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나가지 못하게 했었던 근원에게 이를 부득 갈아주었다.
이 세상의 어딘가에 실재하고 있을 하얀 방 안에서 유일무이하게 나를 지탱해주고 있는 나 자신의 발가락에서부터 퍼져나가는 구역질에 진심으로 넌덜머리가 났다. 단 하나밖에 없었다. 내 몸만이 나의 든든한 아군이었으며 친구이자 가족이자 세상의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시간도 공간도 이미 저 녀석의 손아귀에 잡혀있었으며, 주위의 환경과 인간관계마저 수동적으로 만들어졌었기에 나에게 있는 것은 오직 '트라팔가 로우'라는 이름과 몸뚱이뿐이었다.
"자동차는 언제 산건데."
"지금. 왜."
"일찍 왔길래"
"뭐,바다가려고 샀다. 오전에."
정정하자면 녀석은 도살장과도 같은 거장의 대출업계를 다루고 있었는데 때때로, 돌려받지 못 한 대출금을 위해서 이미 인권을 유린당한 '물건'들의 장기척출을 위해서 목숨을 쥐었다 폈다 할 정도의 권력도 행하고 있다. 처음 녀석과 나 사이의 시간은 우리 쪽 조직원과 녀석 쪽 조직원과의 사소한 말다툼으로 일어난 술집에서의 난동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때의 나는 분홍색이 상징인 다른 두목의 측근에서 의사 겸 장부 정리와 간혹 싸움에 끼어드는 정도의 일을 하고 있었고, 녀석은 이미 자신의 조직을 결성하여 꽤나 뒷세계에서 무기를 잘 다루는 것으로 이름나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1년 전의 일이고, 졸업하자마자 조직으로 들어간 철없던 새내기의 나였었다.
타인의 질척한 핏물이 고인 내 구두 굽의 때각대는 소리를 들으며 장도를 들어 이 사람 저사람 끝없이 베었던 시절의 끝은 3개월 전, 이 집에 들어서면서부터 파했다. 하지만 지금은 역으로 자신의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온 핏물이 내 발치를 적시며 침대 위를 적갈색으로 천박하게 물들이고 있고, 타인의 복부를 찌르던 장도는 내 것이 아닌 저 녀석의 것으로 변질된 채, 내 몸을 강하게 짓누르며 끝없는 하얀 나락으로 쑤셔 박아 넣었다.
매일 매일 매일.
새로운 나날이 3개월 전, 남성으로써의 자존심에서 일궈난 치욕스러운 감정과 수치심으로 범벅이기 시작했다. 한 쪽 팔과 양 발에 싸늘한 은색으로 발하는 금속이 무겁게 자유를 짓눌렀기에 도망칠 방도는 전혀 없었다.
"좋아. 저녁에?"
"아니. 지금 당장."
"그럼 풀어줘."
그렇다면 언젠가 밖으로 나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면 올 것이라는 작은 희망을 일주일 째 되던 날 생각해냈다. 그렇게 삼 개월 채 안 되는 동안, 녀석의 입에 키스를 해 주고 목에 손을 둘러주고 양 발로 허리를 감싸 품 안 쪽으로 잡아끌어주며 교성을 질러주었다. 때때로 벌건 대낮에 찾아올 녀석을 위해 틈틈이 표정연기도 해 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애초에 방 안에 기본적이 살림가구를 들여놓았다는 점에서 녀석의 실수의 골은 커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침대에 나른하게 앉아있던 몸을 바로 세우고 나른한 미소를 띤 채 무거운 발목을 들어 올리고 있었지만 내 심중은 전혀 그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틀릴 때로 비틀린 입술 위로 차갑게 서리 내린 비소만이 그렇게 웃고 있었다.
녀석의 창백한 몸이 그런 내 말에 동의를 표하며 침대 위로 푹 꺼진 자국을 남기기 시작했다. 서서히 다가오는 온기에 저도 모르게 움찔했지만, 이내 내 가슴을 짓누르고 잇던 동그란 형구의 구멍으로, 어느새 녀석이 주머니에서 꺼내들은 열쇠를 꽂아 넣고는 찬찬히 돌렸다. 그래. 마치 이 냉한 금속에 뜨끈하게 달아오른 열쇠를 꽂아 넣는 순간 벌어지는 갈고리와도 같이 너와 나도 이렇게 끝이 나는 거겠지. 어떤 식으로 네 녀석에게서 벗어나야할지 계획적인 감행을 세워놓지는 않았지만 여차하면 바다를 헤엄쳐서라도, 도로를 주행하던 차에서 뛰어내려서라도 끝까지 벗어날 생각이었다. 어차피 분홍색의 털로 전신을 감싸고 있는 조직의 보스에게 성적으로 고문을 당하며 죽어갈 바에야 그 쪽이 훨씬 정신적으로 이롭겠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누군가에게 얽매이는 것은 내 취향이 아니니까-
"그런데 트라팔가."
"왜."
두 다리를 감싸고 있던 것이 녀석의 손아귀로 인해 사라지면서 한결 가벼운 감각을 실어 넣어준다. 속을 꽉꽉 죄어오던 골칫덩어리가 없어지자 저도 모르게 입술 끝이 쾌감에 의해 샐쭉하고 올라가버렸다. 이미 녀석의 말귀가 들어 올리는 만무했지만, 여기서 조금만 더 참아낸다면 저 녀석의 면상에 침을 뱉어 줄 수 있는 날이 머지않았다. 그리고 오랜만에 맡아보는 바깥 공기를 폐부 깊숙이까지 빨아드리며, 놀란 토끼처럼 동그랗게 떠진 녀석의 재수 없을 정도로 노을 진 하늘을 담은 동공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펴줄 것이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이 녀석과 도플라밍고를 만나고 싶지 않았기에 그 세계로 돌아가지 않을 각오를 재차 했다.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던 한적한 시골동네의 작은 병원에 가서 근무하며 서서히 잊어갈 것이다.
오늘 이내의 모든 것들은.
"내가 왜 차 샀는지 알아?"
녀석이 기분 나쁠 만큼 퍼렇게 치켜 올라간 입 꼬리가 꽃이 만개하는 내 미래지향적인 시야에서 상당히 거슬렸지만 최대한 녀석에게 속마음을 들켜서는 안 되므로 그저 실없이 눈을 가늘게 접어 웃어주었다. 왜 샀는데?
"바닷가 쪽에 인근없는 곳이 많거든"
"하? 단순히 놀러가는 건데 그렇게 할 필요가 있어?"
다시 씨익. 처음과는 너무나도 대비될 정도로 조용히 내리깔려진 음흉한 웃음소리가 내 두 어깨를 짓누르며 침대 위로 거칠게 쓰러트린다.
"물론. 네 녀석을 이제부터 그 쪽 별장에 가둬 놓을 건데 차가 없으면 불편하잖아?"
어디를 향해야할지 몰라 갈 곳을 잃은 채 우왕좌왕하는 내 눈동자에 당혹감이 비춰졌는지 그런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녀석이 낮게 웃어재낀다.
비겁한 새끼.
도망가지 못 하도록 이제는 바리케이드까지 치려고 드는 꼬락서니에 그저 시야가 흐릿해지며 목 까지 치솟아 오르는 울분을 토해내고 싶어졌다. 넌 날 도대체 어디까지 끌고 다닐 생각인거야. 풀어줘. 놓아달라고!
점점 눈가를 적시는 열기 맺힌 물기가 역겨울 만큼 밝게 빛나는 붉은 머리칼을 너무나도 예쁘게 흐려놓는다. 진짜 개새끼였다니. 네 녀석만큼은 그 녀석과 다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클로로포름까지 써가며 적이었던 패거리의 나를 납치했던 것은 단순한 협박에 불과하다고 안이하게 판단했던 것이 후회됐다. 녀석의 창백한 손길의 욕정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났어야 했다. 몸이 만신창이가 되기 전에, 빠져나올 탈출구가 다양하게 존재했을 때에, 그리고 그 탈출구를 녀석 스스로가 막아내기 전에 말이다.
"그리고 도플라밍고가 그러던데"
그나마도 녀석에게 얽매이지 않았던 다른 한 쪽 손마저 회색빛의 금속에 가볍고 날카로운 소리로 채워졌다.
"이제 볼 수 없는 녀석의 말이긴 하지만 아무튼"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 인해 숨통이 급박하게 죄어오더니 이내 그간 간신히 붙잡고 있었던 정신을 당장이라도 놓아버릴 정도로 몸속의 긴장감이 빨려나갔다. 신체적으로 녀석에게서 꿰뚫리는 고통보다도 정신적으로 녀석에게 꿰뚫어지는 고뇌가 더욱더 괴롭다는 현실에 허무해져버렸다.
"네 녀석 반응이 죽인다며"
녀석이 이끄는 대로 이끌려지는 손목에는 이미 한 번 풀려났었던 속박이 다시 옭아매고 있었다. 검은색 문신의 의미는 이미 녀석이 세상에서 숨을 끊어버렸으니까 그 위를 차갑게 누르는 검붉은 색이 얼핏 비추는 수갑이 평생 새로운 의미를 표할 것이다. 한 번 벗어났다할 지라도 이제 두 번 다시는 벗어 날 수 없을 것이라는 암묵이 타의적으로 바깥세상으로 끌리어진 시야가 저 멀리 언뜻 보이는 차고에 새로 놓여진 커다란 차의 존재를 깨닫게 해준다.
"카섹스하면"
네가 죽든지 아니면 내가 죽든지 해야만 이 굴레는 끝이 나겠지- 그 분홍게이처럼. 더욱더 커다란 금속덩어리의 틀에 들어가지며 앉혀져버린 채, 귀 바로 근처에서 들리는 녀석의 비웃음에 젖혀지는 등받이와 젖혀지는 스키니 진이 엇박진 괴음을 낸다.
"그래서 차 샀다."
이건 단순한 악몽일 것이다. 어째서 그 녀석이 죽었는데도 난 다른 녀석에게로 돌아가는거지?
시꺼먼 암흑 속에서 특유의 쇠 냄새와 불쾌한 기름 냄새에 뒤섞인 땀 냄새와 정액 냄새에 시야가 아득히 멀어지며 현실을 꿈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아아, 깨어나지 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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