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한다면, 그 때 그 모습을 정확하게 하나하나 기억해낸다면.
다시 널 사랑해 줄 수도, 다시 널 바라봐줄 수도 있는게 바로 나라는 걸.
니가 모든걸 다시 기억해낸다면 그 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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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최경희라고 해요."
"아, 안녕하세요, 저는 이선호라고 합니다."
지독히도 추웠던 1월 중순의 어느 겨울 날.
만나고 싶었으나 만나지 못했던 지독히 그리워했던 그가 아닌 다른사람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당신을 만나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나의 머릿속엔 당신이 아닌 그가 이 자리에 나왔었으면
그가 내 옆에 서있었으면 하고 바란 다는 사실을 당신은 알고 있을까요.
"민우와는 무슨 관계이세요?"
"아, 친구요. 올해 10년인가."
"올해 29이시니까 19살때부터요?"
"아, 그렇게 되는구나. 그럼 경희씨는요?"
회색빛의 잘 차려입은 세미정장이 선호의 모습을 한 층 더 빛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선호의 한쪽 귀에 걸린 자그마한 피어싱을 보고있던 경희가 커피잔을 살짝 내려놓고는
수줍게 웃어보인다. 양쪽 볼이 움푹 들어가는게 29살의 노처녀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순하고 착하게 느껴진다. 딸그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선호의 검지 손가락에 끼워져있는
은빛색의 심플한 은반지가 선호의 커피잔과 작은 충돌을 일으킨다.
"선생님이시라구요?"
"네, 초등학교 교사예요."
커피잔을 차마 입에 다 갖다대지도 못했는데 날라온 경희의 질문에 선호가 싱긋 웃는다.
초등학교 교사. 선호의 성격상 초등학교 교사란 직업은 선호에게 썩이나 잘 어울리는 직업이었다.
워낙에 아이들을 좋아하고 무언가를 가르치기를 좋아하는 선호의 성격에 적합한
직업이었으니 선호가 아무런 망설임없이 교대를 선택한 이유도 그 중 하나였다.
계속해서 까페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에 의해 까페 문에 달린 은빛색의 종이
자신의 몸을 흔들어가며 계속해서 딸랑거리는 소리를 자아낸다.
"저.. 경희씨..?"
"예?"
"동갑인데, 말 놓을까요?"
첫 데이트. 그야말로 그가 아닌 사람과의 첫 데이트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완벽한 기억을 찾지 못한 채로. 모든게 그렇게 잊혀져가는 듯 그렇게 서글프게 끝나버렸다.
영원히 그의 기억에서 다시는 떠오르지 못할 나의 조그마한 기억은
그의 기억 한 구석으로 조금씩 조금씩 자꾸만 밀려나고 있는 듯 했다.
언젠간 기억해줄 거라 굳게 믿었던 나의 믿음이 조금씩 무너져가고 있는 순간이었다.
그를 만나는 순간 순간, 매 순간이 나에겐 조금씩 악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와 달리. 조금씩 조금씩 악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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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팅이 있다는 말에 한껏 멋을 내기 위해 평소엔 잘 하지도 않던
액세서리를 무리하게 했던 탓일까. 경희의 귓볼 부분이 새빨갛게 달아올라있다.
거울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뜯어보던 경희가 속상한 듯
얼굴 표정을 잔뜩 찌푸려버린다. 속상함. 그 이상의 말로는 더이상 표현하기가
힘든 듯 경희의 얼굴이 조금씩 축축하게 젖어간다. 그와 함께 경희의 가슴속에 있는
조그마한 거울이 그만 산산조각이 나면서 깨져버린다. 와장창창.
거울의 파편이 조금씩 경희의 가슴을 찌르기 시작한다.
"..... 흐... 흐어엉.."
달칵 거리는 소리와 함께 경희의 문이 열리면서 경빈이가 어기적 어기적 들어온다.
경희보다 조금 더 큰 키에 좀더 마른 듯한 체격인 경빈이가 화장대에 엎드려서
울고있는 경희를 쳐다보고는 한심한 듯 혓바닥을 차대며 끌끌거린다.
대학교를 다니고 있는 경빈은 경희와 5살차이가 나는 동생이다.
조용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경희와는 다르게 활발하고 왈가닥인 성격의 경빈이는
어릴 때부터 사람들 눈에 띄고 자신 역시 눈에 띄고 싶어 하는 스타일이었다.
"누구 만났는데 이렇게 대성통곡이야?"
"......... .. 누굴 만났든, 왜 남의 방은 들어와서 난리야."
"백일이라서 돈 받을려고 왔다, 왜!!"
시계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어느새 분침바늘이 12시를 향해서 달려가고 있었다.
방 문 옆에 삐딱하게 기대선 경빈이가 껌을 씹어가며 경희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경빈의 고집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던 까닭에 경희가 할 수 없이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내던졌던 가방을 가질러 가기 위해 몸을 일으킨다.
"누군데, 집에 언제 데려올거야?"
24살의 나이에 애인을 만나고 있다면 그건 당연히 결혼을 담보로 만나고 있을
사이란 생각에 경희가 아무런 생각없이 누구냐는 질문을 경빈이에게 던진다.
경빈이가 입을 떼고 있는 순간에도 경희는 그저 같은 과 친구 겠거니 라는 생각으로
여전히 자신의 가방을 뒤적거리며 지갑을 찾는데 열중한다.
"언니도 아는 사람이야. 그 왜 있잖아, 나 19살때 과외하던 혜성오빠.
언니가 막 한때 잘생겼다 그러면서 그랬던 사람있잖아, 그 사람이야."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내가 여태껏 누굴 위해 살아왔나하는 생각 따윈 이미 저 편으로 넘어간지 오래였고
내 눈 앞에 보이는건 싱글싱글 웃고 있는 경빈의 모습과 내 가방. 내 방 뿐이었고
나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모습은 찢어져버린 가슴을 부여잡고 아파하고 있을
내 모습과 환하게 웃으며 결혼식을 올릴 신혜성과 경빈의 모습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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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6개월 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고 온 나를 반기고 있는 것은
두장의 편지 였다. 한개는 며칠 전 시골으로 보냈던 편지의 답장이었고
또 다른 한개의 편지는 경빈과 신혜성의 결혼 발표가 담긴 청첩장이었다.
경빈과 혜성의 청접장이 내 앞으로 날라온 날 한참을 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칠 듯이 아프고 사랑했던 기억따위는 모두 기억 저 편으로 사라진지 오래였지만
그때까지도 내 머릿속에 남아있던 사람은 신혜성. 그 뿐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니깐 말이다.
그때 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나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람은 그 뿐이다.
하지만 지금과 그 때의 차이점이 있다면
그 땐 내가 그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라도 있었다 치지만,
지금은.... 지금 현재는 그는 나의 하나뿐인 동생의 남편이다.
그때의 난 그의 사랑을 받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고 치지만,
지금은.... 지금의 난 그를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기억한다면, 그 때 그 모습을 정확하게 하나하나 기억해낸다면.
다시 널 사랑해 줄 수도, 다시 널 바라봐줄 수도 있는게 바로 나라는 걸.
니가 모든걸 다시 기억해낸다면 그 땐 널 놔줄 수도 있는게 나라는 걸.
지금이라도 니가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기억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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