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이대로가 뭔데? 이대로.. 지금처럼..?
그래, 니가 원하는 대로 하자. 넌 너대로. 난 나대로. 과연 어느정도까지 갈까.
"그래. 이대로."
"니가 원한다면."
난 이미 너의 말에 거역할 수 없어.
*
3년이 흘렀다. 이것저것 한 일도 없이 죽었다 살아난 신혜성과 살을 부대끼며 산지도
어느새 이렇게나 많은 시간이 흘러버린 것이다. 딱히 있는 직업도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없는데 먹여 살려야 할 인간이 늘어난 덕에 벌써 1년째 편의점 아르바이트 중이다.
마음씨 좋은 아저씨 덕택에 시내까지 나와 일하는데도 피곤한 줄 모르겠으니.
내 뒤에 하는 은빈이가 나오질 않는다. 아, 이자식 왜 안 오는거지, 들어가야되는데.
가게를 비워두고 나갈 수도 없고 발만 동동 굴리는데 은빈이가 들어온다.
"왜 이렇게 늦게 온거야."
"아, 미안. 오는데 어떤 분이 우리 편의점을 찾길래 모셔오느라."
"에에?"
"들어오세요."
꽤 탄 듯한 피부색에 큰 키는 아니지만 근육 때문에 덩치가 있어 보이는 사내가 편의점
안으로 들어온다. 사내의 등장에 위압감이 든다. 무언가를 다 제압해버릴 듯한 카리스마.
성큼성큼 내 앞으로 걸어온 사내가 다짜고짜 손을 내민다.
"안녕하세요. 문정혁씨 되시죠?"
"아, 예. 그런데 누구신지...?"
".. 김동완이라고 합니다."
김동완? 신혜성이 말한 그 김동완? 다시 한번 쳐다보고 신혜성을 생각해 내고.
이래저래 고개를 돌려보지만 내가 생각했던 김동완의 이미지가 아니어서 정신이 오락가락.
에이, 설마. 동명인이 아닐까.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신혜성 아시죠?"
".... 아, 네."
단도직입 적으로 물어오는 말에 놀랐다. 신혜성의 김동완이 맞구나. 이런, 저절로 웃음이다.
이 사람 무슨 생각으로 날 찾아온거지, 도저히 짐작이 가질 않는다.
'자리 좀 옮길까요?' 란 그의 질문에 앞치마를 벗어 은빈에게 던지고는 후다닥 가게를
빠져나왔다. 이판사판이네, 될대로 되란 식. 한적한 공원 안으로 들어가자 양복을 입은
그라 유독 눈에 띈다. 꽤 구석진 곳에 앉아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 혜성이와 일본 갈거예요. 혜성이한테 이것 좀 전해주시겠어요?"
그가 멋쩍게 웃으며 명함을 건낸다. 대표이사 김동완 이란 글자가 두눈에 콱 박힌다.
너.. 이 사람 한테 가면 행복할까? 명함을 뒤로 돌리자 공항시간과 '혜성아 보고싶다.'란
글자가 보인다. 답답해 무언가가 목을 죄어오는 것만 같다.
"진짜 뻔뻔하네, 당신."
김동완이 쳐다본다. 무의식 중에 튀어나간 말. 그런데 후회가 안되네. 특이하지?
아무래도 난 당신이 정말 싫은가봐.
"이런걸 나한테 부탁할 정도면 나랑 신혜성이랑 무슨 사이인지는 알겠네요?
그런 사람한테 이런걸 부탁하는 겁니까, 지금?"
"... 혜성이를 믿어요."
"당신 사랑할 거라고?"
질문에 날이 섰다. 베이기라도 할 듯 날카롭게 세워 그를 향해 나름대로의 신경질을
부리는데도 그는 잠잠하다. 내 대답에 답이 없다. 무언의 긍정이란 말인가.
돼체 뭐가 이렇게 자신 있는거지? 신혜성과 같이 살고있는 건 난데, 왜 나보다 당신이
더 그런 여유롭고 당당한 표정을 짓고 내 앞에 있는거지?
"이걸 가지고 신혜성 너 내가 좋아, 당신이 좋아? 이걸 묻자는 겁니까?
신혜성의 선택을 기다리겠다. 이런 의도냐구요!"
"... 그렇습니다."
"... 하, 잘 알겠습니다."
곱게 나갈리 없다. 흥, 뭘 원하는거지. 공원에서 나와서 명함을 구겼다.
내 자존심 마냥 구겨져버린 명함을 주머니에 쑤셔넣어버렸다. 버리는건 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까. 당신은 신혜성을 걸고 도박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겠지만 난 아니야.
내 옆에 있는 신혜성을 가지고 도박을 해서 신혜성을 잃을만큼 멍청하진 않아.
.. 아직 신혜성이 날 사랑하는게 당신을 사랑하는 것 보다 작은 것 같으니까.
"제길.."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
"문정혁! 이거 다 빠는거야?"
머리를 털면서 나오자 3일은 쌓아놓은 듯한 빨래더미들을 가리키며 씩 웃는 녀석이다.
빨아야겠지.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흐음 거리며 빨래더미에서 옷을 하나씩 꺼내며 들춘다.
그냥 쳐박으면 될걸 뭣하러 꼼꼼하게 다 검사를 한데? .... 으악! 명함!!
갑자기 생각나서 머리를 긁적이면서 다가가는데 신혜성이 다짜고짜 주먹을 꽉 움켜쥔다.
이크, 찾아버렸나..
".... 저기."
"김동완.. 만났어?"
아, 문정혁 이 등신. 왜 이러니, 넌.
".. 응."
"무슨 얘기 했어?"
"......... 너 데리고 가고 싶다는.."
신혜성이 명함을 뒤집는다. 탁. 신혜성의 손바닥 위에서 뒤집혀진 명함에 그의 필기체로
씌여진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젠 어쩔래, 자리를 벅차고 일어나 그에게 달려갈래?
아니면 그냥 나랑 살래? 후자는 좀 웃긴건가.
가만히 신혜성의 뒤에 서있는데 명함을 다시 움켜쥐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갑자기 현관문으로
달려 나가버리는 신혜성이다. 이럴 줄 알았어. 그래서 안 줄려고 했던 거였는데.
이젠 끝이다. 잘가라 신혜성.
*
"아저씨 공항으로 빨리 좀 가주세요!"
초조해하는 듯 창밖을 내다보며 발을 동동 굴리던 혜성이가 차가 멈추자 총알 같이
뛰어내린다. 커다란 공항 안에서 사람을 찾는다는게 쉬운 일은 아닐텐데도 이리저리
방방 뛰어다니더니 결국은 게이트 앞에 서있는 김동완을 발견한다.
오랜만에 보는 모습인데도 멋져진 그의 모습에 눈물부터 앞을 가린다.
왈칵 쏟아져내리는 눈물 때문에 다리 힘이 풀리는 듯 후들거린다. 몇 미터의 간격을 두고
가만히 서서 김동완을 멍하니 쳐다보던 신혜성이 결국엔 입을 꾹 다물고
다시 한걸음씩 전진한다.
"김동완-!!!!!!!"
채 몇 걸음 걷지도 못하고 소리쳐 부른다. 그가 돌아봐줄까. 과연, 가만히 서서 그를
바라보자 서서히 김동완의 얼굴이 돌아간다. 신혜성이 있는 쪽으로 서서히.
결국엔 신혜성을 발견했는 듯 씩 웃는다. 승자의 미소. 너가 이겼다고..
"... 김동완, 정말 .. 미안해!!"
"........"
신혜성에게 걸어오던 김동완의 발걸음이 멈춘다. 승자에서 패자가 되는건가.
씁쓸한 미소를 띄우며 몸을 돌린다.
".. 정말 많이 미안! 꼭 행복해!!"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기 전 몸을 돌려 신혜성을 바라보며 싱긋 웃곤 사라졌다.
무언가의 정체를 알았어..
김동완한테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내 마음이 갖게 된 미련이었던거야.
지독하게도 쓸쓸하고 외로웠던 그 미련이 무언가가 되어서 날 짓눌른 거였어.
그런데 이젠 괜찮아. 내 손으로 김동완을 보냈으니까. 괜찮아질거야.
..................... 미안, 김동완.
무언가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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