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솔직인터뷰] 허구연 MBC 해설위원
방송에서의 점잖은 이미지와 달리 허구연 MBC 해설위원은 열정이 넘쳤다. 특히 국내야구가 처한 현실과 자신의 야구관을 피력할 때는 상대를 압도하는 강인한 힘마저 느껴졌다.
그의 개인 사무실에서 가진 1시간 동안의 인터뷰는 마치 해설가 허구연의 강의를 듣고 나온 기분이었다. 해외에서 얻은 선진 야구 경험과 해박한 지식을 거침없이 풀어놓는 그에게 야구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닌 인생 그 자체라는 것이 느껴졌다.
허구연의 강의 같았던 인터뷰를 정리해 봤다.
■ 야구 해설계를 발칵 뒤집은 허구연
정강이 부상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허구연은 31세 때부터 방송 해설을 시작했다. 당시 대학 시간강사로 일하고 있던 그는 야구 해설 제의를 받고 큰 부담없이 이에 응했다. 그 특유의 언변은 곧 좋은 반응을 얻었고 방송사에서 그를 정식 해설위원으로 영입하려했다. 대학 교수가 꿈이었던 허구연의 고민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강단이냐, 야구냐. 선택의 기로에 섰던 그는 결국 자신이 좋아하던 야구를 택했다.
1982년 국내에 프로야구가 시작됐고 MBC의 방송해설을 맡으면서 그는 방송 해설계에 큰 바람을 일으켰다. 이유는 주먹구구식으로 되어있던 국내 야구 용어를 미국식으로 다 바꿔 버렸기 때문. 당시 기존의 해설가들과 야구 기자들은 30대의 젊은 야구 해설가가 생전 처음 듣는 야구 용어를 사용하자 자기들을 바보로 만든다며 반발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팬들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허구연이 사용한 야구 용어들이 지금은 당연하게 사용되고 있는 시대가 왔다.
■ 청와대 고위층까지 동원된 허구연 포섭 작전
1985년 봄, MBC 청룡 구단주 이웅희씨는 허구연 위원을 호출했다. 그는 후반기에 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감독 교체를 생각하고 있다며 허구연에게 감독직을 부탁했다. 허구연은 이 제의를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나 MBC의 요구는 계속됐고 결국 허구연은 서울 시내 한 일식당에서 이웅희 사장과 담판을 지었다. “어우홍 감독(당시 MBC 감독)이 제 고등학교 은사님입니다. 사장님도 아시겠지만 은사님을 밟고 설수 없는 제 입장을 이해해 주십시오.” 결국 이웅희 사장도 이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해 11월엔 삼미 슈퍼스타스를 인수한 신생팀 청보 핀토스에서 다시 허구연에게 감독직을 요청해 왔다. 이번에는 더욱 집요했다. 당시 박정삼 청보 단장은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를 하고 직접 찾아와 부탁을 했다. 허구연은 자신의 고민을 주변 사람들과 상의했다. 그러나 한 선배의 말은 허구연의 마음을 흔들었다. “한번 해봐라. 허 위원이 방송 해설로 명성은 얻을 만큼 얻었잖아. 이제는 한번 야구장에서 실패도 하면서 인생의 쓴맛을 봐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청보는 꼴찌팀이니까 부담도 없지. ” 결국 허구연은 감독직을 수락했고 그의 감독 취임은 전격적으로 발표되어 당시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선배의 말대로 그는 청보에서 인생의 ‘쓴 맛’을 봤다. 결국 감독에서 해임되고 LA 유학을 준비했다. 미국 유학은 당시 LA 다저스의 피터 오말리 구단주가 직접 제의했다. 오말리는 허구연을 위로하며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나는 청보 구단 관계자들이 이해가 안 됩니다. 약팀을 맡겨놓고 1년도 안 되서 짜르다니... 모두 잊고 미국에 와서 연수를 받으세요. 어떤 지원이라도 다 해드리겠습니다. ”
그러나 유학을 준비하던 허구연은 롯데로부터 또 다시 코치직 제의를 받게 된다. 고향 팀에 대한 애정으로 유학을 포기하고 이를 수락, 허구연은 3년 동안 롯데의 수석 코치를 맡게 되었다. 롯데는 89년 봄, 성적이 바닥을 헤매자 또 다시 허구연에게 감독대행 제의를 했다. 청보 감독 시절 구겨졌던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 그러나 그는 이 제의도 거절했다. 거절한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당시 투자에 인색하던 롯데 구단 고위층에 온갖 쓴소리를 했다. “투자 한번 제대로 안하면서 감독하고 선수들만 탓하느냐”고. 결국 89년을 마지막으로 그는 미국 유학을 택했다.
1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허구연은 또 다시 집요한 감독 제의에 시달려야 했다. 이번엔 현대. 95년 태평양을 인수하고 창단을 앞두고 있던 현대는 창단을 시도할 때부터 팀의 자문역을 맡아온 허구연을 당연히 감독으로 낙점해 놓고 있었다.
현대의 제의는 역시 모기업의 규모만큼 규모부터가 달랐다. 현대는 허구연에게 당시로서는 최고 대우인 엄청난 액수를 제안하며 허구연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허구연은 하나의 야구팀에서 일하기보다는 야구계 전체를 위해 일하고픈 포부가 있었다. 허구연은 “나는 감독 체질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며 고사했다. 그러나 현대는 청와대 고위 인사까지 동원해 허구연의 마음을 바꾸려고 했다. 결국 허구연의 고집을 꺾지 못한 현대는 그에게 감독 추천을 부탁했다. 허구연이 추천한 인물은 김재박이었다. 김재박은 현재 10년째 감독을 맡으며 현대를 명문 팀으로 등극시켰다.
■ 감독? 그런 고생을 왜 다시 하나?
허구연 위원은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느냐”는 질문에 곧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도 진정한 능력을 평가받지 못하는 그런 생고생을 왜 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 프로야구에서 감독하기 정말 힘들다고 토로했다. 국내에 내로라하는 감독들도 많은 수모를 당하고 감독직에서 물러나곤 했다고 말한 허위원은 모 유명 감독이 겪은 한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그는 야구계에서도 알아주는 명장이었죠. 그런데 어느 날 경기 중에 덕아웃으로 구단 직원이 와서 그에게 쪽지 하나를 전달한거야. 감독은 뭔가 하고 펴봤죠. 그런데 글쎄 사장이 보낸 쪽지였어. 쪽지에는 선수기용을 어떻게 해라는 등의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어요. 그 감독은 어이없어 하면서 당장에 쪽지를 갈기갈기 찢어 바닥에 버렸죠. 그 후에 어떻게 된 줄 알아요? 그 감독 대번에 잘리고 말았지 뭐야. 그런 일을 내가 왜 하겠어요?”
■ 허구연을 키운 선진 야구 경험
83년 이후 매년 선진 야구를 익히기 위해 미국을 찾는 허구연은 처음 LA 다저스 연수 때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초기 이민자들이 해외에서 흔히 겪는 ‘컬쳐 쇼크‘처럼 허구연도 ’야구 쇼크‘를 겪어야 했다. 그곳에는 그가 기존에 알고 있던 야구 지식과 다른 점이 너무 많았기 때문.
“한국 야구와 미국 야구의 이론에서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당시 LA 감독을 맡고 있던 라소다에게 물어보면 그건 20년 전에 바뀐 이론이라는 겁니다. 충격이었죠. 당시 한국 야구가 그렇게 뒤떨어져 있었던 겁니다. ”
귀국한 허구연은 미국에서 보고 배운 부분을 한국에 도입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국내 지도자들은 허구연이 미국에서 안고 온 생소한 이론들을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바라봤다. 한 가지 예로 지금은 국내에도 일반화 되어 있지만 투구 후 아이싱을 해야 한다는 허구연의 말에 당시 국내 감독과 코치들은 “투구를 했으면 뜨겁게 해 줘야지. 얼음찜질을 왜 해?” 라며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고 한다.
허구연은 자신의 이런 노력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백문이 불여일견 아니었던가. 그는 삼성 구단 고위층이 자문을 구해오자 삼성 선수들을 LA 다저스 캠프로 보내 선진야구에 눈을 뜨게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삼성 코칭스태프와 선수들 역시 허구연이 받았던 충격을 그대로 안고 돌아왔다. 그 뒤로 한국야구는 선진 야구에 빠르게 다가설 수 있었다.
■ 삼성의 과잉 투자는 비난할 수 없다
얼마 전 삼성 라이온즈가 FA(자유계약선수) 심정수, 박진만 등을 영입하면서 천문학적인 돈을 투입한 것에 대해 허구연은 “이에 대한 비난은 구단이 아닌 언론과 선수들이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우선 언론은 보상금 등 정확한 계약 내용을 알리기보다는 단순히 총액만을 거론, 자극적으로 기사를 써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없는 일반인들을 현혹시켰다는 것이다. 선수들도 많은 돈을 받았으면 자선사업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했지만 지금껏 그러지 못한 것이 일반인들에게 좋은 인식을 심는데 실패한 중요한 원인이라고 말했다.
허구연은 오히려 삼성은 국내 프로야구를 더욱 재미있게 만드는 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삼성이 비단 올해만 이렇게 투자했던 팀입니까? 투자는 늘 최고잖아요. 하지만 우승은 두 번 밖에 못했죠. 이렇게 투자는 열심이면서도 우승은 못하고....오히려 한국 야구를 더 발전시킨 장본인이 삼성이죠. 삼성 때문에 팀워크와 알뜰 운영으로 우승을 할 수 있다는 야구의 특성을 팬들에게 각인시켜 주잖아요.” 농담처럼 들리는 이야기였지만 나름대로 일리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허구연은 삼성이나 다른 구단들도 마찬가지지만 선수들에게 투자하는 식으로 국내 야구 인프라 확장에도 신경써 주었으면 하는 바램도 감추지 않았다.
그는 또 “더욱 절실한 것은 행정당국이나 지자체의 인프라 구축이에요. 새구장 건립등이 뒷받침 되지 않을 경우 한국야구는 기행으로 흐를 수 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무대에 선 선수들은 고액 연봉자들인데 낡은 시설의 운동장이 초라한 무대일 경우 팬들이 야구에 열광할 수 있겠어요? 현재 한국야구는 잠실과 문학구장을 제외하고는 가수 보아가 시골 오지의 밤무대에 서는 것과 똑같은 꼴이에요.”라고 꼬집었다.
■ 선수들도 공부를 해야
허구연은 기본적으로 국내 야구 유망주들도 체계적인 교육만 받는다면 충분히 미국에서 통할 수 있다고 보고 있었다. “삼성의 권혁 같은 선수는 미국 마이너리그에도 몇 없습니다.”라고 말한 허구연은 한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제가 토론토 블루제이스에서 코치를 하고 났을때 LG가 플로리다에 전지훈련을 왔었어요. 토론토 단장이었던 펫 길릭이 당시 고졸 신인이었던 이종렬을 보고 한 눈에 반했던 거예요. 그리고는 나한테 저 선수를 데려올 수 있게 LG에 부탁 좀 해달라고 하더군요. 4년 안에 대성할 수 있다고 자신하면서.” 팻 길릭은 메이저리그 내에서도 명 단장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선수 출신으로 젊은 유망주들을 보는 눈이 남다른데다 남미, 아시아 출신 선수들을 메이저리그로 끌어들여 성공시킨 주역이기도 하다.
허구연은 LG 구단이 놔줄리 만무한데다 이종렬 개인에게도 바람만 넣는 부작용이 염려되어 말도 꺼내지 못했다고 한다. 과연 국내 야구 전문가 중 누가 이종렬을 메이저리그급으로 평가했겠는가.
그 만큼 한국 선수들의 재능은 매우 뛰어나다고 허구연은 말한다. 단지 체계적인 훈련을 받지 못해 성장하지 못할 뿐이라는 것.
그러나 허구연은 선수들이 운동하는 기계가 되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소양을 갖춰야 한다고 조언한다.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생각들도 깊고 의식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선수들은 국내 학원 체육의 문제점 때문에 공부를 등한시 했죠. 운동만 잘하면 그저 기능인 아닙니까? 선수들이 책도 읽고 운동 외적인 부분들에서도 나름대로 자기 발전을 위해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스포츠 스타들의 사회적인 지위도 올라가는 거죠.”
후배들에 대한 허구연의 쓴소리는 계속됐다.
“일부 선수들도 그래요. 제 밥그릇 싸움만 하면 보통 사람들의 스포츠 스타에 대한 인식이 좋아질리 없습니다. 돈 많이 벌면 자선사업도 하고 국내 야구 저변 확대를 위해 나름대로 투자도 하고 그래야죠. 간혹 보면 고액 연봉 선수 중에 돈을 어떻게 쓸 줄 모르는 선수들이 많은 것 같아요.”
■ 끔찍했던 2001년 월드시리즈
지금껏 방송 해설을 하면서 허구연의 머리 속에서 가장 지워지지 않는 순간은 김병현이 소속된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 뉴욕 양키스 간의 2001년 월드시리즈였다. 당시 그는 직접 미국에서 현장 중계를 했다.
“70년대부터 메이저리그를 봐왔고 그동안 수없이 야구 경기 중계를 해 봤지만 그때처럼 멍했을 때가 없었습니다. ”
애리조나의 김병현은 당시 2경기 연속 동점홈런을 내준 바 있다.
“첫 날은 그러려니 했어요. 그런데 둘째 날 김병현이 또 홈런을 맞는데 정말 어이가 없더라구요. 홈런이란 게 배팅볼을 던져줘도 쉽게 나오기 힘든 법인데....제가 외야에서 중계를 하고 있었거든요. 양키스의 스캇 브로셔스가 친 공이 내 쪽으로 날아오는 데 순간 옴 몸에서 힘이 다 빠져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결국엔 애리조나가 우승하긴 했지만 정말 잊혀지지 않는 시리즈였죠.”
■ 박찬호와 구대성
한편 허구연은 박찬호의 내년 전망에 대해 부상만 안 당한다면 요령만으로도 10승은 가능하다고 내다봤다. 또한 고액 연봉자라는 정신적인 부담을 떨쳐야 하는 것도 시급한 과제라고 얘기했다. 기술적인 문제에 대해서 “박찬호는 예전같이 꾸준히 빠른 볼을 던지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최근 보면 의식적으로 강하게 던지려하다가 투구 벨런스가 무너져 폭투가 나오는 경우를 자주 보여줬죠. 이제 스피드를 더 끌어 올리려는 노력보다는 릴리즈 포인트를 최대한 앞으로 끌어 당겨 페드로 마르티네스처럼 공 끝이 살아있는 투구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허구연은 구대성의 성공 가능성도 높다고 내다봤다. 구대성이 선발이나 마무리가 아닌 이상 롱맨이나 셋업맨으로는 충분하다는 평가. 전성기를 지나지 않았느냐는 우려에 대해 허위원은 예전보다 제구력이 더 좋아졌기 때문에 그 점은 충분히 만회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허위원은 몇 가지 극복해야 할 부분도 지적했다. “문제는 스트라이크 존이 일본과 미국이 다르기 때문에 이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또한 유인구를 구사할 때 미국 선수들의 팔 길이가 길다는 점도 염두에 두고 뺄 때는 확실해 빼 줘야겠죠. ”
■ 야구 전도사가 되고 싶다
국내에 일반인들이 즐길만한 변변한 야구장 시설이 없다는 사실에 진한 아쉬움을 나타낸 허위원은 국내 야구 저변을 넓히는데 나름대로 일익을 담당하고 싶다는 포부를 나타냈다. 지금 그의 지명도라면 국내 야구인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이 되어 야구계의 숙원 사업 등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도 있었을 터. 그러나 허구연은 정치인들을 만나 그들을 설득할 의향은 있지만 당적을 갖고 정치 활동을 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허구연의 꿈은 야구가 미국에서처럼 하나의 국민 스포츠로 자리해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여건이 갖춰지는 것이다. 그는 진정한 ‘야구인’이었다.
▲그의 사무실은 야구 관련 서적과 해외 야구스타들과 찍은 사진들, 그리고 각종 사인볼 등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 마치 작은 야구박물관 같았다. 실제로 그는 한국에 명예의 전당 박물관이 생긴다면 자신의 소장품 모두를 기꺼이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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