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배와 조선족
류 연 산
머리말
해마다 5월이면 연변의 산과 들은 푸르른 녹음 속에 활짝 핀 꽃으로 생기가 넘친다. 시골에 가면 마을 집집 텃밭에서는 살구, 앵두, 오얏나무ㅡ 뒷동산 언덕에는 사과와 사과배나무가 숲을 이루어 꽃 바다를 연상케 한다. 그리고 숨을 들이키면 맑은 공기에 진하게 묻어있는 꽃향기가 가슴 전체를 골고루 적셔준다.
그것은 단순한 꽃향기가 아니다. 이 땅에 뿌리내려 4대, 5대로 살아가는 조선족의 냄새이다. 사과나무며 살구나무며 앵두나무며 오얏나무며 사과배나무에 깃든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라. 당신도 분명 나와 같은 향수에 젖을 것이다. 그리고 또 싱그러운 꽃향기 속에 녹아있는 이동원, 최일선, 최창호 등 이주민 1세대의 땀 냄새를 맡고 진한 감동을 받을 것이다.
1 사과와 이동원
재래로 북위 42·c 이북에서 사과재배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므로 두만강 이북에서는 사과를 재배한다는 것은 하나의 꿈이었다. 바로 그 꿈을 현실로 만든 사람이 이동원이다.
그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없다. 심지어 생년월일조차도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 다만 조선 함경북도 길주군 사람이며 벌써 1930년대에 지금의 용정시 삼합진 대소에 살았다는 정도로 파악된다. 그의 집은 서북방향으로 산을 등지고 앉아서 동남향으로 두만강을 마주보고 있었다.
어느 해 봄 이동원은 고향 길주에 다녀오는 길에 사과나무 묘목 몇 그루를 가져다가 집 뒤 언덕 밭에 심었다. 그리고는 팔삭둥이를 키우듯 온갖 정성을 다하여 보살폈다. 대소는 함경북도 무산군과 회령군 중간쯤 해서 두만강 가에 위치해 있다. 그러므로 길주하고 남북으로 직선거리로도 멀리 떨어져 있고 기후차이가 심해서 사과재배는 꿈도 꾸지 말라는 충고들을 무던히도 받아왔다.
정성이면 돌에도 꽃이 핀다고 그해 겨울을 난 묘목은 끝내 엄동설한을 이겨냈다. 여느 나무와 같이 순이 돋고 이파리가 나는 것을 본 이동원은 어느덧 연분홍 사과 꽃을 보고 탐스러운 사과 알을 보는 심정이었다.
그는 좀 더 많은 사과나무를 심으려고 작심했다. 부지런한 이동원은 양지바른 자갈밭을 과원으로 만들려고 집식구들을 몽땅 동원시켜 돌을 주어내게 하였다. 매일 7, 8명의 노력이 나서서 돌을 주어냈다. 달 있는 밤에도 달과 함께 자연에 묻혀서 일손을 멈추지 않았다.
1935년 봄에 이동원은 또 길주에 가서 일본에서 가져왔다는 사과나무묘목 100여 그루를 사다가 돌을 주어낸 자갈밭에 옮겼다. 가물이 들기만 하면 이동원은 온 집식구를 이끌고 두만강의 물을 길어다 목마른 사과나무에 주었고 겨울이 되면 얼굼을 당하지 않도록 짚으로 사과나무묘목을 싸주었다. 이듬해 봄에 대부분의 사과나무묘목은 또 푸르름을 자랑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사과나무는 이동원의 살뜰한 손길아래서 푸르싱싱 자랐고 마침내는 열매를 맺게 되었다. 그것은 광복되기 몇 해 전의 일이다. 첫 과일을 딴 이동원과 그 일가의 기쁨은 하늘에 닿고도 남음이 있었다. -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제7집 <<풍랑>> (제212-213폐이지)
그러나 광복이 나고 토지개혁이 되면서 소우동의 지주로 꼽힌 그는 청산을 피해 가족을 데리고 강을 건너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의 사과원은 촌정부의 집체소유로 되었다. 촌에서는 주인 못지않게 사과원을 알뜰히 가꾸었다.
1964년 주덕해주장이 대소로 시찰을 왔다. 그때 마을사람들은 그 사과를 대접했다. 홍조를 띤 처녀의 볼 마냥 탐스러운 사과를 받아든 주장은 전 주에 사과원을 꾸려볼 구상을 무르익혔다. 그는 요녕성 개현에서 초빙해온 과수전문가 관치성(만족)을 대소에 파견하여 과수농장을 세웠다. 1990년 대소의 과수는 16만 7천여 그루나 되었고 사과 품종도 <<홍성>>, <<국광>>, <<황원수>> 등 30여 종이나 되었다. 비록 이동원은 떠나갔지만 그의 개척정신과 대담한 실천이 없었더라면 오늘 두만강 변에 사과원이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2 연변의 미츄린 최일선
미츄린이란 구소련 농업과학자의 이름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이후 중국은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권에 속했고 그로 말미암아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면에서 소련을 모델로 하였다. 과수재배에서 미츄린의 방법이 보급되었고 그것을 실천에 옮긴 사람이 최일선이므로 그를 <<연변의 미츄린>>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최일선은 현재의 화룡시 서성진 명암촌 사람이다. 필자의 고향 북대촌 하고는 산을 하나 사이 둔 거리였고 봉밀하(蜂密河)라고 부르는 같은 강물을 먹고 사는 부락이었다. 그러나 명암촌은 깃대봉을 마주 보고 봉밀하 북안 산언덕에 자리한 산골마을이라서 평강벌 상단에 자리한 우리 마을 보다 자연조건이 열악한 편이었다. 그런데 최일선은 당지의 악천후를 이겨내고 여러 가지 과실재배에 성공했다. 그는 조선에서 가져온 복숭아를 당지의 오얏나무에 접하여 새로운 우량품종을 얻어냈고 대련의 사과나무를 옮겨 연변에 뿌리박고 열매를 맺는데 성공했다. 그는 여러 가지 과일나무를 배육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내한성이 약한 조선의 앵두를 내한성이 강한 재래종 연변 앵두에 접목하여 만들어낸 <<명암앵두>>였다! . 그가 생존해있을 때까지 명암촌 마을 뒷산 허리 바위에는 친히 페인트로 쓴 <<자연과의 투쟁은 지구력으로!>>라는 큼직한 구호가 오가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것은 바로 평생의 온갖 정열을 과일재배에 바친 그 자신의 정신을 반영한 것이였다.
3 사과배와 최창호
최창호(崔昌虎 1897-1967)는 조선 함경북도 경성군 주남면 용정동 태생이며 1909년에 아버지 최병일(崔秉一)을 따라 중국 안도현 내두산으로 이주하였고 7년 후 다시 지금의 용정시 도원향 소기촌(小箕村)에 와서 사망할 때까지 정착했다. 소기는 중화민국정부가 마을을 한문으로 등기할 때 지어낸 이름으로서 원래의 지명은 작은 버치골이다. 노두구진에서 부르하통하를 건너 10여리 뻗어간 골짜기에 위치하였는데 지형이 마치도 버치처럼 생겼다고 해서 생겨난 이름이란다.
처음에 그들 일가가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인가 하나 없는 무인지대 숲이었다. 그들은 러시아 강동에 가서 금전을 하여 번 돈으로 10헥타르 땅을 사서 밭을 개간하고 팔간 집을 짓고 거처를 정했다. 그리고 1921년에 동생 최범두가 조선의 고향을 다녀오면서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배나무 가지 6대를 가져왔다. 그것을 텃밭에서 2, 3년을 자라난 돌배나무가지에 접지를 했다.
북청군과 이곳은 위도 차이가 3도나 된다. 북청의 가지는 첫해 겨울에 겨우 3대가 살아났고 꼭 3년의 시련을 거쳐서 동해를 입지 않도록 기후에 적응했고 6년 째 되는 해에야 비로소 꽃이 피고 열매를 맺었다. 배는 어른들 주먹만큼씩 하게 컸고 속살이 희고 부드럽고 당분이 많고 씨가 작았다. 부본(父本)은 돌배나무이지만 돌배에 비해 비할 바 없이 좋다는 의미에서 처음에는 이 배를 <<참배>>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1952년 <<참배>>의 모양이 사과처럼 생겼다고 해서 <<사과배>>라고 고쳐 불렀다.
광복 전 용정현과 화룡현에서 사과배나무 재배하기 시작했다.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성립된 후에는 주덕해주장이 몸소 용정시 모아산 남쪽 기슭에 만무(萬畝: 1헥타르는 10무임) 사과배 기지를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재배를 시작했다. 현재 용정 과수농장의 과수밭 면적은 25,000무나 되며 과일생산량은 1천3백만키로를 웃돈다. 1991년 전국 과일전시평의에서는 <<전국 우질과일1등>>, <<우질녹색식료품>>, <<배왕>>의 월계관을 안아왔다.
1950년대 초 정부에서는 최창호가 재배해낸 세 그루의 사과배나무에 <<사과배모수(母樹)>>라는 패쪽을 세웠고 1989년에는 용정시 정부에서 사과배모수 앞에 <<사과배선조기념비>>를 세웠다.
맺는 말
위에서 이동원, 최일선, 최창호 세분을 구구히 이야기하는 목적은 그들의 실천을 통해 연변에 이식된 부동한 과일에서 오늘 날 조선족의 모습을 비쳐보려는데 취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동원은 조선에서 사과나무를 가져다가 연변에 뿌리박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였다. 이는 우리 민족이 한반도에서 강을 넘어 이 땅에 와서 삶의 터전을 개척한 이주과정을 상징하기도 한다.
최일선은 조선의 앵두를 연변의 토종앵두에 접하여 <<명암앵두>>라는 새 품종을 생산했고 최창호는 조선의 배를 연변의 돌배에 접지하여 사과배를 만들어냈다. 이는 우리 민족이 이 땅에 와서 살아가면서 중국 조선족으로 자리매김을 한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명암앵두>>나 사과배라는 이름이 연변에만 있는 것처럼 조선족이란 이름도 중국에만 있다. 조선에서는 조선민족, 한국에서는 한민족이라 부르고 일본에서는 재일조선인, 미국에서는 미국적 한인(韓人) 등으로 호칭되므로 구태여 <<중국>>이라는 나라수식을 하지 않아도 조선족은 중국 국적의 조선인(혹은 한인)임을 알게 되는 것과 같다.
현재 조선족의 상징물로 학자들은 사과배를 꼽고 있다. 아래에 연변대학 허명철교수의 말을 빌어 이 글을 마무리 지으려고 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특산으로 자랑하고 있는 사과배는 어찌 보면 조선족문화의 형상화한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자체 특유의 생존이념을 토대로 대대로 내려오면서 이미 체질화 되어 있던 조선문화를 중국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문화와 접목시켜 형성한 조선족문화 또한 중국문화도 조선문화도 아닌 새로운 문화형태로서 민족문화사에서 특유의 멋을 내고 있다. 다만 사과배가 <명품으로 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조선족문화도 현재로서 자기의 이론적 기틀과 기본성격에 대한 규명이 제대로 잡히지 못하고 있다. (<<사과배와 조선족문화>>(연변일보 2006년 6월 25일)에서)
매년 가을이면 사과배는 그 맛과 질에 대해 공인을 받으면서도 판로가 없어서 걱정이다. 그처럼 조선족문화도 우수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조선족 인구의 감소로 말미암아 위기를 맞고 있는 실정이다.
2006년 7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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