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빠담빠담]을 그린 만화가에게서 자신의 작품이 유럽만화같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
당황스러웠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당황스러움의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정리해보면 "일본만화와 같지 않은 것 = 유럽 만화"라는
사고가 황당함의 가장 큰 이유였다.
일본식 만화가 아닌 것, 전에 시도되지 않은 비쥬얼한 표현, 나름대로 교양을 풍기는 소재, 보통 단행본
만화와는 다른 구성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유럽만화"라는 평로 이어진 것이다.
여기엔 (유럽만화가) 무언지 잘 몰라도 "유럽만화 = 예술"이라는 전제가 있기도 하다. 재미있는 것은
유럽만화들이 예술로 평가받을 때 미국만화는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는 "미지의"존재로 남아있다는 거다.
듣도 보도 못한 것은 마찬가지일텐데 말이다. 미국만화는 익숙함의 문제를 떠나서 "만화"라고
이야기할 때, 이미 제외되는 듯한 느낌마저 준다.
아니 익숙함의 문제라기보다는 우리는 일본식 만화에 익숙해져 있어 다른 만화를 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꽉 짜여진 스토리와 정교한 배경 등의 일본식만화에 길들여졌다면 이렇다할 줄거리도 없고 때로 헐렁한
느낌이 나며 다소 규격화된 레이아웃에 대화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미국만화[캘빈 앤 홉스]는 밋밋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뚝뚝 끊긴 이야기들이 부정기적으로 나오는 만화에서 재미를 느낀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인지도
모른다. (현재 한국에서는 ㄷ일보를 통해 일주일에 2번 부정기적으로 [캘빈 앤 홉스]를 볼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독자가 미국만화를 만나는 유일하고 대중적인(?) 방식은 신문연재를 통해서인데,
이마저 너무 불안정하다.)
이런 열악함에도 여러 칸으로 구성된 한편의 긴 이야기가 4칸으로 완결적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그 4칸에서 리듬감과 시적인 느낌이 나니 놀랍기만 하다!
물론 신문의 4컷 속에 갇힌 연재만화의 압축적인 느낌과 달리 책이라는 자유로운 공간에서 만나게
되면 풍부한 이야기와 다양한 구성에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게 되고. ..
(미국은 한국과 달리 일요일판 신문이 따로 존재해서 만화에 많은 면을 할애한다.
그래서 일요일판 만화에서 굉장히 다양한 시도들이 펼쳐진다.)
[캘빈 앤 홉스]는 1985년부터 1995년까지 10년간 미국을 비롯한 2400여개의 신문에 연재되던 만화다.
귀여운 악동 캘빈과 현명한 호랑이 홉스가 주인공인 일종의 버디 만화이다.
種을 넘어서는 꼬마소년과 호랑이와의 우정을 그린 만화지만 "아름답고 순수함"과는 거리가 멀다.
캘빈과 홉스는 인간과 그들이 만들어낸 세상에 대해 중얼거리고 세상이 돌아가는 규칙을 의심하며
자유로움을 찾아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작은 철학자들이다.
(캘빈과 홉스라는 이름은 16, 17세기 철학자이름에서 따온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만화[캘빈 앤 홉스]는 좌충우돌하고, 삶에 대한 우울이 담겨있기도 하고, 세상에 대한 냉소가
담겨 있고, 자연과 동화되기도 하는 이 작은 철학자들의 깜찍스런 기록이기도 하다.
매력과 깜찍함으로 뭉친 캘빈 그리고 홉스 [캘빈 앤 홉스]는 캐릭터의 매력을 모른다면 즐길
수 없는 만화다. 기-승-전-결의 짜여진 스토리 없이 5명의 고정멤버들이 10년 동안 이야기를 빚어낼 수
있을 만큼, 캐릭터는 살아있다.
상황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울 수 있는 캐릭터가 훌륭한 캐릭터라는 작가의 주장은 만화에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고 보니 이것은 시트콤의 성패비결아닌가!)
주인공 캘빈은 만만하지 않은 땅꼬맹이다. 해맑고 순수한 어린 아이도, 그렇다고 대책없는 말썽쟁이도
아니다. (문득, 느물거리는 성적환상과 "역시 애는 애야"라고 말할 수 있게 만드는 순수한(?) 행동으로
묘한 안심을 불러일으키는 짱구같은 녀석이 새삼 짜증스럽게 느껴진다) 캘빈은 그저 그런 꼬마녀석이다.
싫은 음식 앞에서 오만상을 찡그리고, 약올리면 길길이 날뛰고, 깡패에게 보기좋게 맞고 다니고,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애를 괴롭히면서 낄낄대고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반격도 만만치 않다)
자신만의 클럽을 만들고, 괴로운 수업시간을 벗어나기 위해 우주비행사나 망토를 뒤집어쓴 정의의
사자로 변하며 상상의 나래를 펴는, 꼬마소년이 경험하는 1차원적인 흥미진진한 세계는 삶에 대한
진지함과 이어져있기도 하다.
다친 새를 보며 죽음을 알아가는 과정이라든지, 인간은 왜 사는가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은 캘빈의
안에서 자연스럽게 하나로 연결된다.
(바로 그것이 여러 가지 복합적인 상황을 아우르고 있는 훌륭한 캐릭터가 가진 힘이겠지!)
그와 "막역한" 홉스는 캘빈의 마음 속과 세상을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진 녀석이다.
캘빈의 장난보다 한 술 더 뜨는 장난을 일삼기도 하지만 캘빈의 치기를 잠재울 수 있는 "현명한"
녀석이다. 인간인 캘빈과 친하게 지내지만, 인간이 아닌 존재임을 늘 자랑스러워하며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 동시에 그는 진지함과 재치를 두루 가진 정말 멋진 녀석이다.
캘빈 앤 홉스. 위트와 심오함의 세계 수업시간에 "1+2=?"라는 문제 앞에서 "이건 제 정치적인 신념과 맞지
않아서 풀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한 후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나름대로 풀 가치가 있는 문제야."
라며 끄적대는 캘빈의 이야기와 낮잠을 자는 홉스 위로 물풍선을 던지려고 사악한 표정을 짓는
캘빈에게 눈을 감은채 "인생은 그렇게 짧지 않다" 며 얘기하는 홉스의 이야기는 웃긴다.
재밌다는 표현으로 설명되기에는 너무 부족하다. [캘빈 앤 홉스]는 내 안의 알 수 없는 감정을
만들어내면서 숨겨진 감정들을잘 짚어내는, 위트가 넘치는 만화이다.
톡톡 튀는 재치를 단순한 말장난에 가둬두지 않고, 철학적,사회적 문제들이나 진지한 상황들이나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것도 [캘빈 앤 홉스]가 갖는 매력이다.
"인간은 왜 사는 걸까"라는 캘빈의 심각한 질문에"호랑이 먹이"라고 대답해 리는 재기발랄함과
인간에 대한 회의와 불합리함에 대한 냉소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것이다.
그 안에는 인간의 폭력성과 합리를 가장한 불합리성과 효율성만을 강조한 개발주의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이 숨어있다.
예를 들어, 숲 속을 걷던 캘빈이 버려진 쓰레기를 보고 신경질을 내면서 인간은 왜 유해물질이나
핵무기 실험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떠들면 홉스는 인간이 아닌 것이 자랑스럽다며 한 마디 내뱉고,
캘빈은 동의한다면서 몸에 걸친 옷을 벗으며 숲 속을 걸어가고 있고, 치타의 속도를 이야기하며
인간의 나약함을 비웃는 홉스와 이에 인간은 똑똑하다며 로케트와 폭탄과 핵무기와 원자로가
있다며 반격을 하는 캘빈의 모습은(물론 치타의 우수함에 대한 이야기로 끝이 나버린다)
인간이란 존재의 부정적인 면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세상에 대한 수많은 물음과 인간을 보는 삐딱한 시선과 어처구니없게 까불어대는 캘빈과 홉스의
세계는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고, 실제 만화가 진행되는 지극히 현실적인 공간들과 계절의 변화와
자연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공간들과 우주비행이 있는 상상의 공간들도 내용만큼의 활기찬
호흡을 만들어낸다.
그들이 세상을 향해 또는 자신을 향해 던지는 수많은 질문과 대답은 그래서 더욱 사람들을 설레게
하는지 모른다. 탐험을 떠나자는 let's go exploring! 그들의 마지막 대사처럼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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