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이자 초파일인 오늘 오후에 양재천으로 산책을 나갔는데 날씨가 참 더웠다.
비가 내린다더니 그래서인지 찐덕거리며 벌써 날씨는 여름을 방불케 하는가 싶었다.
덥고 습한 여름이 다가오면 나는 종종 한 미국드라마가 떠오르곤 한다.
중학교인지 고등학교시절인지 헷갈리지만, 아주 무더운 여름이었는데, TV에서 2부작으로
미니시리즈를 한편 방영했었다. 별 생각없이 심드렁하게 그 드라마를 보고 있었는데,
이게 의외의 재미를 주었고 보고 난 후에도 상당한 여운을 남겼던... 때문에 지금까지
내 기억 속 어느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어 소개해볼까 한다. 좀 길다. ^^;;
줄거리는 지금 생각하면 아주 단순했던 것 같다.
어디서 흘러 들어온지 모를 한 남자가 미국 남부지방의 큰 농장에서 여름 동안 농장 일을
하게 된다. 비밀스럽지만 남자답고 건장한 이 남자 역은 80년대 역시 드라마 <마이애미 바이스>
에 출현해 일약 스타덤에 오른 돈 존슨이 맡았다. 좋지도 싫지도 않던 배우였던 돈 존슨이
이 드라마에서 만큼은 아주 매력적이고 멋지게 나왔다. <마이애미 바이스>가 아니라 지금 소개
하는 드라마에서 말이다.
다시 드라마 줄거리로 넘어가면 농장 주인에게는 아들과 딸이 있었는데, 아들은 우유부단하고
방탕한 반면 딸은 독립적이고 어려운 사람을 도울줄 아는 반듯한 여자었다.
아들은 이미 결혼해 아내가 있었으나, 부창부수라고 이 여자도 행실이 좋은 여자는 아니인지라
돈 존슨(극중 이름은 도무지 생각이 안 나므로 돈 존슨이라 부르겠음)을 유혹하고 수작을 부렸다.
돈 존슨은 아들과 친분을 유지하며 어느덧 농장 일과 더불어 주인 가족에 대해서도 파악하고...
한편, 주체적으로 살아가려 하는 딸은 사사건건 보수적인 아버지와 오빠와 대립한다.
또한, 어디서 온지 모를 돈 존슨이 아버지나 오빠와 잘 지내는 걸 보면서 그도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며 그를 오빠의 아내와 불륜이나 저지르는 파렴치한으로 몰아 그를 혐오한다.
그러나, 돈 존슨은 처음부터 농장 주인의 딸에게 마음이 있었고 그들과 잘 지내려는 이유 역시
그들이 그녀의 가족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농장 일 뿐 아니라 그녀 모르게 도움이 필요한 마을
사람들을 도와주었고, 여름이 끝나갈 무렵의 자선파티에서 그녀가 만든 도시락을 비싸게 산
사람도 바로 그였다. 이 도시락사건을 왜 언급하냐면 이 사건이 아주 로맨틱하게 그려졌기 때문
이기도 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돈 존슨과 딸의 사이가 급속도로 진전되기 때문이다.
여름이 끝나고 돈 존슨은 농장을 떠나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딸에게 함께 갈 것을 권하지만,
그녀는 거절한다. 돈 존슨은 혼자 떠나기로 하는데, 결국 돈 존슨의 진심과 그간의 모든 오해의
정황을 알아차린 그녀가 떠나는 그에게로 달려가 함께 떠나면서 끝이 난다.
제목이 분명 'long hot summer'로 알고 있어 혹시 원작이 있을까 싶어 찾아보았는데, 윌리암
포크너의 소설인 것 까지는 알고 있지만 찾을 수가 없어 보지 못했다.
나에게 꽤 신선하고 짜릿한 충격을 줘서 지금까지 좀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을 하고 있다.
특히, 그 도시락사건. 딸이 정성을 다해 만든 도시락을 자선파티에 내놓는데, 그걸 알고 있는
돈 존슨이 일찌감치 도시락을 찜해 그녀와의 데이트를 꿈꾸지만, 딸은 그런 줄 꿈에도 모르고
자신의 도시락을 비싼 값을 치르고 산 사람이 깊은 사이는 아니지만 사귀는 것 같았던 남자인줄
(설명이 이상하지만, 그렇게 보였음)알고 고마운 마음을 담아 좋은 시간을 함께하리라 생각하며
그 앞에 나타난다.
그러나, 자기의 도시락을 산 사람이 돈 존슨인 걸 알고 실망을 금치 못해 쏘아대지만, 도시락을
산 사람의 요구를 들어줘야만 하는 룰에 할 수 없이 그 앞에서 춤을 추는데... 결국 눈물을 쏟고 마는...
돈 존슨이 이때 지었던 미안해하면서도 씁쓸해하던 그 묘한 표정을 난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한다.
초록이 무성한 숲에서 하얀 원피스를 입고 짧은 금발머리를 나부끼며 춤을 추던 그녀의 몸짓도
생각이 나고... 극중 딸 역을 한 배우의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미인은 아니지만, 웨이브진
금발의 커트머리가 인상적이었고 조리있는 말솜씨로 상대편을 제압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아... 또 마지막 씬에서 떠나는 돈 존슨에게 달려가 그를 붙잡으며 예전에 그가 했던 말을 똑같이
그에게 되돌려주며 키스하던 그 장면도 베스트였다. 두 사람 모두 청자켓과 진을 입었고 달빛이
비춰 그들의 실루엣을 더욱 몽환적으로 만들어 주었는데... 아... 내가 이러니 결혼을 못 하지. -ㅁ-
지면낭비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한번쯤 이 드라마에 대해서 짚어 보고 싶었다.
겨울에 <눈에 대한 스밀라의 감각>이라는 베스트도서가 떠오르듯이, 여름 즈음에 나는 이 드라마가
생생하게 눈에 밟힌다. 올 여름은 얼마나 덥고 길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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