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러 콘돔 (Killer Condom / Kondom des Grauens, 1996) 독일 | 호러, 공포, 스릴러 | 107분
뉴욕을 고자의 공동묘지로 만들어가는 콘돔의 습격. 동성애, 거세공포증, 드랙퀸, 정치와 종교에 대한 풍자로 가득한 독일 영화 [킬러 콘돔]은 B급 영화다운 자유스러움과 컬트 풍의 매력을 과시한다.
하기야 누가 독일을 가르켜 관념의 나라라고 했던가. [킬러 콘돔]은 독일 영화하면 바로 연상되는 특유의 관념적이고 딱딱한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1. [죠스]의 음향 효과와 2. [대부]의 주제곡, 3. [사이코]의 샤워 살인 장면과 4.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골목길 등을 패러디한 수법도 돋보인다. 결정적으로 5. [알파치노의 광란자]를 패러디 했을때는 기가막힐정도로 코믹한 전개방식에 혀를 내두를 정도. 번득이는 재치와 유머가 난무하는 <킬러 콘돔>은 그야말로 포복절도하며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낭자하는 선혈. 조악한 특수효과. 묘한 공포(혹은 자지러지는 웃음?). B급 영화가 50년대 이후 공상과학 영화로부터 '호러'라는 장르를 선택해 일련의 실험적이고 기발한 작품들을 선보일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저예산이라는 영화제작의 핸디캡을 충분히 상쇄할 수 있는 풍부한 상상력. 그것이 B급 영화를 지탱하는 힘이며, 엄청난 스케일과 비용을 필요로하는 우주보다는 그나마 '돈이 덜드는' 지상의 공포가 그들에게는 좀 더 친근(?)하고 매력적인 소재였을테니 말이다. 그리고 거기에 성(性)과 관련된 노골적인 묘사와 비교적 질이 낮은 유머를 첨가한 트로마 사의 영화들은 가짜 피와 살임이 금방 '뽀록나는' 전형적인 B급 호러 영화들을 짜릿한 공포와 웃음 속에 뒤범벅시키곤 했었다. 화학약품을 뒤짚어 쓴 흉칙하고도 강력한 정력의 소유자 <톡식 어벤져The Toxic Avenger>부터 양성(혹은 자웅동체?)의 성을 지닌 살인마를 통해 메이저 영화를 비꼬았던 <엽기 호러공장(Terror Firmer)>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내놓은 영화들은 분명 화면 어딘가에 '메이드 바이 트로마'라는 도장을 찍어놓은 것만 같다.
그런 독특한 색채를 띄는 트로마의 영화중에서 덜 잔혹하지만, 더 당혹스러운 <킬러 콘돔Kondom Des Grauens>은 B급 호러 영화인 동시에 상당히 공격적인 퀴어영화다. 물론 그 공격의 대상은 '모든 쾌락과 죄악의 근원'인 남성 동성애자의 성기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동성애자와 이성애자를 구별하지 않고 덤벼드는 사나운 콘돔은 모든 육체적인 사랑을 방해하고, 그들 모두를 성불구로 만들어 버린다. 안전한 성생활을 보장하는 물건이 바로 둘도없는 위험한 흉기가 되는 셈이다. 사실 내놓고 얘기하기에는 좀 쑥스러운 '콘돔'의 이미지는 다소 양면적인데, 에이즈를 예방하고 원치않는 피임에 효과적인 수단인 동시에, '성적인 방종' 역시 그것은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킬러 콘돔'이라는 이 기묘한 상상물은 인간의 윤리와 기독교적 가치관의 대립, 에이즈와 동성애의 부등식이라는 일방적인 편견 그리고 콘돔으로 그 안전성을 보장받는 성거래에 대한 따끔한 이야기들을 그 우스꽝스러운 공포 뒤에 감추어 놓는다.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은 B급 영화답게(?) 에밀 비클리츠키Emil Viklicky의 스코어 2곡과 주제가 한 곡만을 소박하게 수록하고 있지만, 주인공의 테마와 메인테마 그리고 주제가라는 영화음악의 기본적인 골격은 나름대로 갖추고 있는 편이다. 시종 줄담배를 피우며 비관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게이 형사, 마커로니의 테마 'Italineisches Thema'는 그의 태생이 이탈리아의 시실리임을 말해주는 이국적인 스코어로, 만돌린과 현악기의 묘한 어울림이 주인공의 만화적인(사실 이 영화의 원작은 랄프 쾨닉Ralph Konig의 만화다) 캐릭터를 재치있게 그려내고 있으며, 프라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들려주는 이 영화의 메인 테마 'Dumbo & Kondom Thema'는 킬러 콘돔을 둘러싼 모종의 음모가 한꺼풀씩 그 정체를 드러내던 순간마다 어두운 화면 뒤로 그 공포의 색채를 짙게 깔아주었던 스코어다. 또한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모든 대사가 독일어로 처리되었던 <킬러 콘돔>의 주제곡 역시 독일어로 불리워지고 있는데, 루씰레트릭Lucilectric의 예리한 보컬과 유로 테크노 스타일의 리듬감이 돋보이는 'Kondom Des Graunes'는 모든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면서 익살스러운 해피엔딩으로 이어지던 영화의 라스트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흥겨움을 불어넣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