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페이지*
  로그인
 
name    조선일보
subject    시론/ 국제 문제된 ‘베트남 신부’ 현수막
home    없음

시론/ 국제 문제된 ‘베트남 신부’ 현수막

민가영 홍익대 여성학 강사


▲민가영 홍익대 여성학 강사

동네에 걸린 현수막은 그 동네 삶의 성격을 반영한다. ‘종부세 결사 반대’를 외치는 현수막은 종부세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만 걸린다.

‘베트남(여성), 절대 도망가지 않습니다.’ 국내의 특정 지역에서만 볼 수 있기에 정작 국내인들은 무관심했던 이 현수막 사진이 2007년도 미 국무부 인신매매 보고서에 실렸다. 결혼 브로커들에 의해 ‘매매’되는 동남아 여성들의 실태 고발과 함께.

언뜻 보면 ‘불쌍한 베트남 여성’, ‘인신을 매매하는 한국’, ‘글로벌 나라 망신’ 등에서 생각이 끝날 수 있는 사건이다. 그러나 ‘도망자 현수막’은 단지 인신매매의 위험성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변화하는 여성들 삶의 조건, 강력하고 단일한 권위를 가졌던 ‘결혼과 가족’이 여성들의 삶에서 상대화되고 있는 현실, 그리고 그 속에서 불안해 하고 있는 남성들의 자화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관계가 시작되기도 전에 그 관계에서의 도망을 걱정해야 하는 것, 관계가 시작되기도 전에 불안에 눌려야 하는 것…. 이건 분명 시작부터 잘못 되었다는 증거이다. 오히려 관계에서 여유는 여성들에게 있다. 도망가면 되니까. 말하자면 이 현수막은 오랫동안 남자와 여자의 성 역할을 함축했던 가사,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가 국제 결혼 지구화시대에 어떻게 ‘여자는 배 남자는 항구’로 바뀌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셈이다. 결혼을 위해 이동하는 것도 여성이고, 그 결혼에서 다시 떠나가는 것도 여성이다. 여자들을 항구에 정박시켜 놓으려 했던 수많은 경제적, 문화적 감금장치들은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이동성 앞에서 맥을 못 추고 있다.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Beck)의 지적대로 ‘위험사회’인 이 시대에, 특히 자원 없는 언더클래스(underclass) 사람들의 삶 속에 불안과 위험은 평준화 되었다. 어느 곳에서나 어떤 관계에서나 안정적인 삶의 전망을 찾는 것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재미있는 건 전망이 부재하기 때문에 기존의 권위들은 약해져 가고, 삶의 양식으로 표준화되어 있던 것들은 해체되고, 선택지는 넓어져 가고 있다는 점이다.

언더클래스 사람들에게 도망, 도피는 일종의 생존전략이다. 집에서 가출을 하고, 학교에서 자퇴를 하고, 결혼에서 도망을 친다. 참고 인내하고 견디면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굳이 현재를 유예하며 인내할 필요는 없다. 안정성을 가진 사람들의 생활이 농경민적 방식에 가깝다면, 불안한 사람들의 그것은 유목민에 가깝다. 세상은 변했고, 이제 날개 옷을 빼앗겼다고 그대로 나무꾼에게 주저앉는 선녀가 존재할 만큼 결혼은 강력하고 단일한 권위를 갖지 않는다. 선녀 옷을 훔친 대가로 평생 선녀의 도망을 감시하며 불안에 떨어야 했던 나무꾼. 이제 한국 사회는 하늘로 올라가 버린 선녀를 비난하고 나무꾼을 동정하는 대신 부당하게 선녀를 잡아 두었던 나무꾼을 인신매매범으로 지목하는 데 공감할 만큼 나름대로 권리에 대한 감수성을 갖기 시작했다. 날개 옷을 빼앗는 것으로는, 돈을 주고 신부를 데려오는 것으로는, 폭력과 권위로 엄포를 놓는 것으로는, 이제 결혼은 유지되지 않는다. 국제 결혼을 피할 수 없게 된 현실 속에서 궁리해야 할 것은 어떤 종족이 덜 도망가는 기질을 가졌는가, 어떤 민족이 4대 조상까지 군말 없이 제사를 모셔줄 만큼 헌신적인가, 어떤 인종이 체취가 좋은가를 알아내는 것은 아니어야 한다.

국제 결혼으로 이주해온 여성들은 다인종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법을 성찰할 수 있게 함으로써 한국이 진정한 글로벌 사회로 나아갈 수 있게 기회를 열어준 사람들이다. 단, 이 기회는 내가 부당하게 훔치고 있는 상대방의 권리, 존엄성이 무엇인지에 관해 스스로 질문할 때만 열릴 수 있다. 이들을 통해 글로벌 시민권이라는 진보적인 사회를 상상할 것인지, 도망자 현수막을 계속 걸 것인지,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name password memo
          

▲ prev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적용받은 외국인 기초수급자 2007년 5월말 현재 800여명
▼ next "나리도 예쁜 귀 갖고 싶어요"...선천성 소이증앓는 김나리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