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한국인… 차별대우 싫어요" 1996년 한국행… 같은 처지 여성들 민원 해결 앞장서는 '왕언니' "언니 나예요." 연방 전화벨이 울렸다. 필리핀 출신의 제나이타 비라리얼 파퐁(42)씨는 국제결혼 이주여성이다. 1996년 결혼과 함께 한국으로 온 그는 오늘도 필리핀 동생들의 전화를 받는다고 바쁘다.
"모두 우리자치학교에서 만난 결혼 이주여성 동생들입니다." '우리자치학교'는 부산 서구 충무동 주민자치센터에서 운영 중인 국제결혼 이주여성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결혼 이주여성과 자녀들의 한국 적응을 위해 한글 및 한국문화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파퐁씨는 자원봉사로 주민자치학교에서 열리는 한글 교육시간의 필리핀반 통역을 담당하고 있다.
"10명의 한국 주부들이 자원봉사 강사로 활동을 하고 있는데 이들과 이주여성들의 의사소통을 돕고 있어요." 처음에 파퐁씨는 충무동 주민자치센터에서 저소득층 아동을 위한 영어 강사로 일했다. 강사로 활동하며 그는 주민자치센터 직원들에게 이주여성 한국어 교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제가 한국에 왔을 때는 지금처럼 국제결혼 인구가 많지 않아서 이주여성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 전혀 없었거든요." 스스로 책과 TV를 보며 한글과 한국문화를 독학한 그는 다른 동생들이 겪을 언어·문화적 어려움을 누구 못지않게 잘 알고 있었다.
통역을 하다보니 자연스레 다른 이주여성들의 민원을 해결하고 각종 정보를 전달하는 일까지 떠맡게 됐다. 금융계좌 만들기, 김치찌개 끓이기 등 소소한 일상부터 전출입 신고, 자녀 양육비 지원, 취업 문의까지 궁금한 사항이나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동생들은 '왕언니 파퐁'을 찾는다. 찾는 사람이 많다보니 전화기 사용 시간도 길어졌다.
"지난해 크리스마스에는 이주여성 자녀를 위한 장학 프로그램 정보를 동생들에게 알려준다고 전화를 좀 돌렸죠." 나중에 남편이 "이번 달 전화요금이 왜 이리 많이 나왔지?"하는데 "글쎄" 하고 딴청을 피웠지만 속으로는 뜨끔했단다. "다른 동생들 일 도와준다고 바쁜 아내를 모르는 척 지켜봐주고 아껴주는 남편이 있어서 이렇게 봉사할 수 있죠."
그래도 각종 민원사항 해결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힘들 때도 있어요." 파퐁씨의 눈이 조금 붉어졌다. 돈도 되지 않는 일에 발벗고 나섰지만 100% 만족이란 없기에 가끔 볼멘소리가 돌아온다. "그렇게 생각해요. 나야 이제 한국에 적응해서 잘 살고 있지만 낯선 곳에 온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는 남을 많이 도와주었다는 필리핀 부모님의 좋은 점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듯했다.
이런 파퐁씨가 있어서 그런지 우리자치학교에는 부산의 다른 구에 거주하는 이주여성들까지 몰려온다. "멀리 경남 진해에서 오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고 보면 이주여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교육만 제공해주는 곳이 아니라 속 시원히 자신들의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고, 또 그 이야기를 들어주고 해결책을 제시해 줄 존재가 있는 공간이다. 그게 '이주여성 사랑방' 같은 형태로 거주지 가까운 곳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파퐁씨의 바람이다.
"예전보다는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도 길에서 우리를 보고 뭐라는 사람들이 있어요." 한번은 시장에 갔는데 외국인이라고 바가지를 씌우더란다. 그럴 때가 제일 속 상한다. "우리도 한국인이에요. 차별하지 말고 똑같이 대해 주세요." 오늘도 동생들의 도움 요청에 잰걸음을 하는 파퐁씨가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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