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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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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 한가족 시대] 몸은 고되지만 행복도 희망도 ‘두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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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문경의 투잡맘’필리핀댁 마리첼 엘델라크르즈
“한국에서도 첩첩산중인 문경에서 내 인생이 펼쳐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14일 경북 문경시 문경읍에 있는 농협 사과 선별장에서 만난 필리핀 출신 마리첼 엘델라크르즈(35)씨는
“2001년 처음 문경에 시집왔을 때는 너무 가난한 한국 시댁의 생활형편으로 항공료가 없어 친정 아버지의 빈소조차 찾지 못할 정도로
 암울함 그 자체였다”고 털어놓았다. 마리첼씨가 태어난 곳은 필리핀에서 승용차로 1시간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타르락시다.
농촌 가정에서 9남매 중 8번째로 태어난 마리첼씨는 고향에서 5년제 공업대를 2년간 다니다 중퇴했다.
1970년대 한국 농촌에서도 오빠가 대학에 다니면 여동생이 가발공장이나 섬유 전자 공장에 취업을 한 것처럼, 마리첼씨도 언니가 졸업반이어서 눈물을 머금고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가난 때문에 학업을 포기한 마리첼씨는 나중에 다시 캠퍼스로 돌아가겠다고 다짐하고 고향에서 공장에 다녔으나 쥐꼬리만한 월급은 저축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주위 사람들이 ‘희망’을 찾아 한국으로 가는 것을 보고 한국행을 결심했다. 그것도 단순 취업이 아닌 결혼을 통해서다.

◇마리첼씨가 경북 문경시 문경읍내에 있는 농협 사과 선별 창고에서 사과를 포장하고 있다.
2001년 가을 현지 국제결혼 중개업자는 달콤한 말로 그를 유혹했다. 지금의 남편인 권모(43)씨가 회사에 다니는 데다 돈이 많고 점잖은 사람이라며 ‘극찬’했다. 이 한국 청년은 운명처럼 같은해 10월 마리첼씨의 생일날 집에 찾아와 청혼을 했다. 마리첼씨는 당혹스러웠다. 한편으론 이 청년의 적잖은 용기에 마음이 끌렸다. 이 같은 탓에 사실 관계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고향집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같은해 11월 인천국제공항에 닿기 전까지 두려움이 앞섰다.
“남편은 정말 돈이 많은 사람일까. 앞으로 내게 어떤 미래와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하나님 도와주세요. 낯선 타국에서 저를 지켜주세요”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시댁에 도착한 순간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이 돈 잘 버는 회사원이라는 말을 들은 터라 어느 정도는 집이 번듯할 줄 알았다. 하지만 시댁은 작은 방 2개에 좁은 거실, 부엌 등이 딸린 게 고작이었다. 남편도 회사원이 아니고 굴착기 기사였다. 일감이 많지 않아 노는 날이 많았다.
방 5개에 거실이 2개나 있는 필리핀 친정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절망감이 더 컸다. 그저 국제 결혼을 반대했던 부모님의 말을 듣지 않은 게 후회스러울 뿐이었다. 그렇다고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고 생각하고, 고향에 있는 부모에게 부끄럽지 않은 딸이 되겠다고 입술을 깨물었다.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은 빵이라도 먹으면 되지만 제일 큰 고역은 화장실이었다. 재래식 화장실은 도저히 이용할 수가 없어 한동안은 남편이 승용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도로 휴게소까지 데리고 가기도 했다.
지금도 화장실 이용이 가장 불편하다는 마리첼씨는 “읍사무소에서 올해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고쳐준다고 약속해 그날만을 고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처음 한국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눈물로 보낸 마리첼씨는 결혼 이듬해인 2002년 2월 첫아이를 가지면서 한국의 삶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손자를 기대하며 자신을 아껴주던 시아버지가 지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 충격이 컸다.
시아버지를 잃은 슬픔 등을 달래기 위해 그녀는 문경읍에서 영어학원 강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영어 외에 한국말을 할 수 없어 두 달 만에 학원일을 접었다. 생활비를 벌면서 주민들과 잦은 접촉 기회를 갖기 위해 사과따기 등 논과 밭일을 가리지 않았다. 농사일이 별로 없는 5월에는 냇가에서 다슬기를 잡아 파는 등 주민들과 억척스럽게 일하면서 한국말도 배웠다. 그는 현재 우리말이 유창하지는 않지만 의사소통에는 별 어려움이 없다.
2004년 둘째를 낳은 그녀는 두 아들 양육비를 마련하기 위해 인근 마성면에 있는 공장에 취업했다. 이곳에서 일하면서 번 돈으로 친정에 보내면서 생활에 보람을 느꼈다. 하지만 그 보람은 오래 가지 못했다. 친정 아버지가 폐암에 걸렸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했다. 형편이 넉넉지 않아 고향에 가지 못하고 전화로만 통곡했다. 2006년 7월 친정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마지막 가는 모습을 지켜보지 못했다.
마리첼씨는 “아버지가 나를 한국으로 시집보내고 4년이 넘도록 보지 못해 병이 나 돌아가신 것 같다”며 “모든 것이 나의 불효로 여겨져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행히 그녀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1년 만에 경북도가 이주여성 친정 방문사업의 하나로 지원한 항공료를 받는 행운을 잡아 아들 둘과 함께 꿈에 그리던 고향을 방문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어머니와 만나 꿈같은 생활을 하고 돌아온 그녀는 활력을 되찾았다.
최근 여성회관에서 실시하는 한국 요리 강좌에 참여한 그녀는 된장찌개 등 한국 음식을 곧잘 한다. 요즘은 시어머니께 잡채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있다.
지난 3월부터는 문경읍 갈평리에 있는 용흥초등학교에서 일주일에 4차례, 2시간씩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수업이 끝난 뒤에는 곧장 농협 창고로 달려가 사과 선별작업을 한다.
“지난 추석 전에는 작업량이 많아 밤 10시까지 고된 일을 했지만 그녀는 웃음을 잃은 적이 한번도 없다”고 농협 직원들은 귀띔했다.
마리첼씨는 “결혼 초기에는 막막한 한국생활이었지만 이제는 희망이 보이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는 자신감과 용기가 솟구친다”며 환하게 웃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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