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지류인 토평천 유역에 자리잡고 있는 우포늪 초입의 '우포늪 생태관(경남 창녕군 유어면)'.
1층 전시관 한 구석에서 30~40대 외국인 주부 4명이 수첩과 볼펜을 꺼내 들고 강의를 받아 적고 있었다.
"개구리밥처럼 물에 떠 있는 것은 부유식물, 물수세미처럼 물 속에 완전히 잠겨 있는 것은 침수식물….
해설사가 이런 걸 헷갈리면 망신이에요."
지난 23일 오후 4시쯤, 우포늪 생태관의 베테랑 해설사 임영숙(여·49)씨의 강의가 이어지자,
필리핀 출신인 안젤리나 코달예키(여·30)씨가 말했다.
"정말 어렵다. 만날 외워도, 머리에 몇 개 남지 않아요. 며칠 남지도 않았는데 큰일 났다."
강의에 몰입해 있는 이들은 모두 필리핀, 중국, 일본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다문화 가정의 주부들이다.
창녕군의 습지 보호를 위해 각국 정부 대표와 환경운동가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는 국제행사인 람사르 총회(이달 28일~11월 4일)를
앞두고 '외국어 전문 생태해설사'로 선발돼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중이다.
◆"한국 온 지 14년 만의 첫 봉사"
창녕군이 '외국어 전문 생태 해설사 과정' 교육생을 모집한 것은 지난 6월.
람사르 총회 기간 중 우포늪을 찾아 올 외국 환경단체 회원이나 외국인 관광객을 맞이하기 위해서다.
농촌 지역에서 외국어 전문 인력을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묘안(妙案)으로 한국 농촌으로 시집 온 다문화 가정의 주부를 활용하는 것이었다.
우포늪 생태관 노용호(45) 관장은 창녕군 내 다문화 가정 주부들 중 한국어가 능통한 이들을 집중적으로 찾아갔다.
"한국의 생태에 대해 교육도 해주고, 국제 행사 기간 중 자원봉사도 할 수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교육 과정에는 창녕군 주민 22명이 접수했다.
이 중 10명이 필리핀, 베트남, 일본, 중국, 태국에서 한국으로 시집 온 다문화 가정의 주부들이었다.
파격적인 대우를 내세운 것은 아니지만, 다문화 가정 주부들은 '제2의 조국인 한국을 알기 위해',
'한국에서 처음으로 자원 봉사를 해 보고 싶어' 생태 해설사 교육에 지원했다.
전업 주부부터 남편과 함께 농사를 짓는 부인, 어린이집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강사까지 직업은 다양했다.
중국 헤이룽장성에서 2000년 창녕으로 시집 온 중국동포 이춘화(35)씨는 결혼 전인 1994년에는 산업연수생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그 시절 식당에서 일하며 월급을 떼여 봤고, 단속반을 피해 도망자 생활도 했다.
이씨는 "그때는 '한국이 정말 싫다'는 생각이 많았다"고 했다.
그러다 현재의 남편과 2000년 결혼하고 정식으로 한국 국적을 받으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씨는 "불법 단속에 쫓겨 다니던 내가 이제는 한국을 '우리나라'라고 할 수 있게 됐다"며 "
'우리나라'를 위해 14년 만에 처음으로 봉사활동을 하게 돼 감회가 새롭다"고 말했다.
◆일본어 조류 도감 공수해 와 생태 공부
다문화 가정 주부들은 9월 초부터 5주 간 조류·곤충·식물·관광 해설을 전공한 대학 교수와 전문가로부터
우포늪 생태 교육을 받고 수료증까지 받았다.
지금은 다문화 가정 주부들의 입에서 곤충, 식물, 새 이름이 쑥쑥 튀어 나오지만,
2~3개월 전만 해도 한국 사람도 낯선 단어 앞에서 외국인 주부들은 고전했다.
"가시연꽃, 검정말, 자라풀, 댕기물떼새, 물자라…. 이런 한국말이 쉽게 외워 지겠어요.
한국말로 설명 듣고, 집에서 영어 사전 찾아 가며 공부했어요."
농사 짓는 남편과 딸 둘, 아들 하나를 둔 안젤리나씨의 수첩에는
우포늪에 사는 동식물 이름과 늪의 생태에 대한 설명과 함께 한글과 영어로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1998년 일본에서 한국으로 시집 온 가와노 미쓰에(42)씨는 지난 달 초
일본 미야자키현에 있는 친정 아버지에게 부탁해 식물, 곤충, 조류도감을 공수해 왔다.
미쓰에씨는 "일본에 살 때는 람사르가 뭔지도 몰랐고, 곤충이나 식물에는 관심도 없었다"며
"한국에 와서 일본에서도 몰랐던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다문화 가정 주부 덕에 예산 절감
창녕군은 다문화 가정 주부 덕에 예산을 줄일 수 있었다.
이들은 행사 기간 중 해설사로 활동하며 평일에는 2만원, 관광객이 몰리는 공휴일에는 3만원을 받는다.
사실상 자원봉사인 셈이다. 전문 통역사를 고용했다면, 하루 일당이 최소 20만~30만원은 들었겠지만,
다문화 가정 주부들 덕에 경비를 10분의 1로 줄였다.
외국인 탐방객들도 통역을 거치는 것보다 훨씬 생동감 있는 설명을 들을 수 있게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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