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언론 보도를 통해 올해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될 대상자가 결정되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올해 헌정 인물 중에는 장기려 박사님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새삼 나는 장기려 박사님을 추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린시절, 즉 내가 기억을 가지고 있는 유아 시절부터 중학교 시절 서울로 전학을 갈 때 까지, 나는 장기려 박사님을 자주 만나뵙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주로 장기려 박사님이 주관하신 무교회 "부산모임" 집회에서 였다. 일요일이면 부모님과 함께 송도의 복음병원내 사택 또는 부산진역 옆 청십자병원 원장실에서 십여 명 안팎의 사람들이 모여 가지는 "부산모임"에 무척 자주 참석을 했었다. 워낙 오래전 일이라 생생한 기억은 없지만, 간단히 예배를 드린 후에 주로 지난 일주일 동안의 성서와 단테 신곡 등에 대한 공부를 여러 사람들이 발표했었던 것 같다. (注 : 무교회 주일 집회에서는, 교회적인 형식주의를 배척하여, 아주 간소한 예배와 함께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 동안에는 주로 성서 연구 발표회를 가진다)
장기려 박사님이 어떤 분이셨고 어떤 삶을 사시다 승천하셨는지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굳이 자세한 설명은 필요가 없을 듯하다. 다만, 아래에 두 편의 관련 글을 옮겨 보았다.
개인적으로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장기려 박사님과의 만남은, 중학교 2학년 초 서울로 전학을 간 후, 그 해 여름방학 동안 잠시 부산을 다니러 왔을 때의 일이었다. 그 날이 일요일의 부산모임에서 였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청십자병원 원장실로 장기려 박사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었다. 그때 장기려 박사님은 내 이름을 불러주시면서 안부를 물으시고는, 당신께서는 나를 위해서 매일 기도를 드린다고 하셨다. 내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실 것으로 생각하고 찾아간 중학생에게는 정말 뜻밖의 말씀이었다.
장기려 박사님께서는 내 부모님을, 특히 부친을 무척 좋아하셨다고 한다. 내 부모님은 장기려 박사님이 6.25 혼란 중 월남하실때 홀로 데려온 차남인 장가용 교수와 동갑이니 자식뻘의 아랫사람이었지만, 늘 당신의 친구라고 소개하며 환대해 주셨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나는 만년의 장기려 박사님을 만나뵙지 못했고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내가 6년동안의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기 직전의 성탄절에 승천하셨다. 귀국 후 병역문제 등으로 대전과 서울을 오가며 복잡하고 바쁜 상황 중에서도 잠시 짬을 내어 마석 모란공원묘지에 있는 장기려 박사님의 묘소를 몇 번 찾아 뵈었었다. 처음 청량리 역 앞에서 꽃다발 하나와 소주 한 병을 산 후, 춘천가는 시외버스를 잡아 탔던 날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돌아오는 길에는 일부러 먼 길을 걸으면서 인근 배 과수원들의 가판점을 둘러보고 싸게 파는 배를 양손에 들고 올 수 있을 만큼 많이 사가지고 돌아왔었다.
오늘 아침, 장기려 라고 하는, 남에게는 한없이 자애롭고 관대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나눠주고 헌신했었지만, 자신에게는 한없이 엄격했던 과학자, 의사, 신앙인을 내가 직접 가까이서 만나 볼 수 있었던 일이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서,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 무엇으로 어떻게 남아 있을까... 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2006.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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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려 박사 생각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만난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닮은 인물을 한 사람을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장기려 박사를 선택하겠다. 그는 한 평생 의사였는데 돈을 벌거나 이름을 내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오직 병든 사람들을 돌보아 주는 일에만 자신의 시간과 정력을 다 바쳤다.
사모님과 가족들을 다 북에 두고 어린 아들 하나의 손목만 잡고 월남한 장 박사는 주로 부산 복음병원을 근거로 가난한 이들의 병을 고치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는 보름의 둥근달을 바라보는 것이 취미였다고 하는데 그 달을 북에 있는 사모님도 함께 보고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장 박사는 미국에서는 달을 바라 볼 재미가 없다고 콜롬비아의 교수로 있던 조카에게 말하곤 했다고 들었다. 평양과 뉴욕은 달뜨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어린애 같은 순진함이 있어서 나 보다는 17년이나 연장이었지만 만나면 언제나 친구처럼 가까이 느낄 수가 있었다.
지난 1월20일 과학기술부와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이 올해 헌정 대상자 3명을 선정하였는데 그 중에 장기려 박사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보고 그 어른에 대한 솟구치는 그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김동길 2006.02.17. www.kimdonggi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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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려 박사와의 대화
얼마 전 병중에 있는 우인(友人)과 함께 부산 암남동 소재 고려신학 계통의 복음병원을 찾아, 이 병원 원장이자 우리나라 의학계의 보물인 장기려(張起呂) 박사를 찾았다. 이 병원이 처음 문을 연 것은 6.25사변 중이었다. 당시 피난지였던 부산 영도에서 천막 두세 채로 박사와 박사의 친우 되는 전종휘 박사 등이 온갖 희생을 감내해가며 전쟁의 공포와 기아와 질병 속에서 떨고 있는 동포들을 위해 진료를 개시한 것이다.
당시 여러 차례 천막 병원을 찾은 일이 있었던 나로서는, 이번 송도 바다를 내려다보는 산 위에 아담하게 지어진 4, 50명 수용 규모의 신축 병원을 보고 기쁨을 금할 수 없었다. 밤에는 박사의 숙사에서 날이 밝도록 여러 가지 말씀을 들었다. 실례일지 모르나 그날 밤 박사에게 들은 이야기를 나의 기억대로 몇 가지 적어보기로 한다.
교제나 운동을 전혀 모르는 박사로서는 모 미군 기관을 통해 이번에 이 정도로나마 병원 건물이 서게 된 자체가 아주 의외의 일이었다고 한다. 결국 이는 지난 수 년 동안의 천막 수고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로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고 했다. 박사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움직일 뿐이라고 하며, 이제는 병원에 오는 환자를 일일이 하나님이 친히 보내신 자로 대하고 있고 했다. 그러므로 병원 운영에 있어서도 물질적인 예산이나 계획보다는 하루하루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걸어가자는 방침인데, 아직까지는 별 지장이 없었다고 한다.
박사는 서울에 계실 때보다 건강도 나아진 듯 했는데, 자기 몸을 위한 걱정은 아예 포기하고 죽는 날까지 타인을 위하고 직책을 다하는 방침으로 나아가니 도리어 건강이 호전된 듯하다고 했다. 사실 현대인은 대개 사소한 병으로 큰 신경쇠약에 빠지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그리고 박사는 이런 생활 중에서 요사이 사명적인 삶에 대해 체험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병자 때문이라면 한밤중에라도 쉽게 깨지만 다른 일에 대해서는 무슨 일이고 아주 무성의하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이것이 놀랍게 생각되었다.
병자의 고통을 생각하면 참을 수가 없어서 밤중에 수술을 하는 경우도 많은 모양이었다. 환자 가운데는 박사의 수술이 전혀 아프지 않다고 말하는 분도 있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박사의 병자에 대한 사랑, 그리고 집도(執刀)와 함께 올리는 박사의 기도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박사는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아니, 좋은 일일수록—심중에서 자발적으로 해야 하므로, 병원 운영에 있어서 결코 다른 이들에게 강요나 명령으로는 아니 하는 방침이라고 했다.
언젠가 엄동설한에 노천에서 다 죽게 된 사람 대여섯 명을 발견하고는, 처음에는 의사, 다음에는 간호사를 보내어 살피게 한 다음, 양심상 그대로 둘 수 없다는 중론으로 전원을 입원시켰는데, 그날 밤 두 사람이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직원 중에는 자발적으로 밤늦게까지 일하는 분들도 있어, 간혹 방문하는 서양인들이, “일본에서 듣기로는 한국인들이 게으르다고 했는데 공연한 소리”라고 칭찬을 하고 간다고 했다. 아침에는 환자들의 예배 시간에 내가 한마디 하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나는 “박사님은 여러분을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로 받으시는 모양인데, 나는 반대로 하나님이 여러분을 박사에게 보낸 것은, 병도 병이지만 그보다는 박사님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믿음에 들어가도록 하기 위함인 줄 안다”고 했다. 그리고 “병 치료는 우리의 육체에 대한 것이나, 하나님을 믿는 것은 우리가 영원히 사는 영혼의 구원”이라고 덧붙였다.
盧平久 (1959년 7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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