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학이나 의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이라면 모두다 동의하는 사실이 아마도 사람(또는 생명체)의 형질은 타고나는 것과 (환경에 의해) 길들여지는 것이 있는데 둘다 대등하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때 유전학이 유행할 때는 유전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식으로 유전자 만능의 생각을 가진 과학자들도 많았지만, 현재의 추세는 유전자와 환경이 둘다 대등하게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 아마도 대부분의 과학자가 가지는 생각일 것이다. 솔직히 내가 하고 있는 현대 면역학이란 것도 대부분의 경우 유전적인 차이를 가능한 배제하고서 순전히 환경적인 영향의 차이를 연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집 4남매는 어린시절의 많은 시간을 외할머니와 같이 살면서 자랐다. 대한제국 말 고관대작 명문가의 따님으로 亡國 과 함께 몰락한 양반가의 어려운 생활이었지만 왜정시대에 신식 고등교육을 받으신 소위 인텔리 개화여성이셨던 외할머니는 항상 모든 문제에 好不好 와 의견이 분명하셨다고 기억된다.
그런 외할머니는 우리 남매들 중에서 나를 유독 편애하셨는데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내가 느끼기에도 나의 식사 습관이 거기에 포함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어머니가 며느리인 안해에게도 여러번 이야기를 하셔서 안해도 가끔씩 이야기 하는 것으로, 나는 어려서 부터 식사를 할때 항상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 가장 볼품이 없는 것들을 먼저 먹고, 반대로 맛있는 것, 좋은 것들은 나중에 먹거나 남기는 습관이 있다.
물론 이런 습관은 유전학적으로 볼 때 결코 생존에 유리한 습관이 아니다. 즉, 유전적으로 선택될 가능성이 적은 형질인 것이다. 실제로 어머니는 그러한 나의 식사 습관 때문에 맛있는 것을 다른 sibling 들에게 빼앗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시고, 나의 기억에도 남의 집에서 식사를 할 때 나의 그런 습관을 잘 모르는 집주인들이 내가 싫어하는 것들을 내가 좋아하는 것인 줄로 착각(?)하고서 내게 더 먹으라고 권하는 경우도 흔히 있었다.
이렇게 유전적으로 unfavorable 한 형질을 정말 내가 유전적으로 타고난 것인가? 아니면, 외할머니에 의해서 또는 외할머니의 호감을 받기 위해서 환경적으로 길들여진 것인가? 를 한때 스스로 깊이 생각해 본 적도 있었던 것 같다.
우리 큰 딸 아이는 식사습관이 안해를 많이 닮았다. 싫어하는 음식들이 무척 많고, 그렇게 싫어하는 음식들은 전혀 삼키지 조차도 못한다. 한의학적으로는 타고난 체질 때문에 그러한 음식이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 것이고 그래서 전혀 입에 대지도 못한다고 하니 불쌍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특히, 딸 아이는 조그만 상처만 있어도, 티끌만 묻어 있어도 그런 음식을 까다롭게 골라낸 후에 깨끗하고 좋은 것만을 골라 먹는다.
둘째인 아들 아이는 내 식사습관을 닮았다. 전혀 외부적/환경적 영향은 없었다고 과학자인 내가 볼 때도 생각되는데, 아들 아이는 음식을 먹을때 좋지 않은 것부터 골라 먹는다. 물론 맛없고 싫어하는 것을 먼저 먹는 것은 아니지만, 아들 아이는 분명히 더럽고 깨지고 볼품 없는 것 부터 먼저 골라 먹는 것이다.
확증은 아니겠지만, 이러한 식사습관도 환경이 아닌 유전에 의해 타고나는 것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겠다. 또한, 외할머니가 나를 편애하셨던 이유도 아마 타고난 나의 형질이 외할머니와 비슷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정해 본다.
물론 과학적인 결론은 아니다.
(2006. 5. 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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