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읽은 뉴스 글들 중에는 서울대학교가 과학윤리 강좌를 처음으로 시행한다는 것도 있었고 (사실 올 봄에 서울대에 교수로 있는 친구의 부탁으로 이곳 학교들의 과학윤리 교과과정을 복사해서 보내준 적이 있다), 대한민국의 연간 낙태시술 숫자가 (예나 다름없이) 연간 출생아 숫자에 버금 간다는 것도 있었고, 어느 정신나간 산부인과 의사가 낙태시술에서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는 식의 글을 써서 올린 것도 있었다.
미국의 대학에서 과학윤리 교육이 처음으로 의무화 된 것은,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과학논문 조작의혹 사건이었던 이마니시-카리/오툴/볼티모어 사건이 발생한 이후인 1993년 부터라고 기억된다. 일명 볼티모어 사건이라고 불린 이 사건은 10 년을 넘게 조사한 끝에 무혐의로 결론이 났지만, 그 여파는 대단했다. 황우석 사건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아래의 글에서 처럼, 모든 윤리 (과학윤리, 의학윤리, 생명윤리) 교육들이 "사람을 죽이고 나만 살자는 교육" 이었던 것 같다. 아니 좀더 정확히, "자식까지라도 죽이고서 나만 잘 살자는 교육" 이 아니었겠는가?
아래에 이전 게시판에 올렸던 글을 다시 옮겨 본다.
(2007年 歲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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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생명력의 저하 작성자 : GCI 주인
결혼할 무렵인 4-5년 전만 해도 한국은 언제 IMF/외환위기 사태가 있었느냐며 정말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실제 그 때 미국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 했었지요) 온 국민이 흥청망청 돈쓰기에 미친(?) 사람들 같았었는데 바로 몇 해를 못 가서 온 국민이 빚 때문에 못살겠다고 야단을 하게 되었다더군요.
아래의 글에서 언급된 "세계 최악의 경제상태라는 불우한 생활조건" 이 다시 한국을 찾아 온 것도 아닐진데 여기저기서 돈 때문에 어미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입에 담기도 끔찍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현실에서 슬픔을 느낍니다.
10 여년 전 내가 처음 미국에 왔을 무렵 미국을 비롯한 온세계는 중국에서 일어나는 정부 주도의 강제적인 낙태정책을 비난했읍니다. 한국 사람들도 공공연히 우리는 중국처럼 안하고도 인구정책에 성공했다며 중국을 비난했지요. 하지만, 솔직히 그 때 나는 중국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한국이 중국보다 더 미개한 나라일지도 모른다고 했읍니다. 중국인들은 정부 정책때문에 어쩔수 없이 낙태를 하는지 몰라도 한국인들은 자기들이 편하려고 자기들이 좋아서 낙태를 한다. 그것도 엄청나게 많이 한다. 얼마나 미개한 일인가?
아래의 글이 쓰여진지 10 여년이 지난 후인 70 년대 내가 국민학교를 다닐 무렵의 한국민들은 이미 그런 미개한 문화에 완전히 익숙해진/동화된 상태였읍니다. 학교 수업시간에도 교사가 학생들에게 공공연히 "자식이 하나면 문화인이고, 둘이면 현대인이며, 셋이면 야만인이다" 라고 가르쳐도 아무도 어떤 학부형도 항의하는 일이 없었으니까요. 물론 이런 교육현장은 80년대, 90년대를 지나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을 것입니다.
(2004年 8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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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력의 저하
나는 오늘날의 인류를 생명력이 저하된 상태라고 규정하고 싶다. 물론 우주 정복시대가 아니냐고 반론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내 눈에는 이렇게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징후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류의 자살소동, 살인소동이다.
근래 우리 사회에서 특히 이런 현상이 심하다. 심지어 어머니가 자식들의 생명을 끊고 자신마저 죽은 일마저 있었다. 물론 세계 최악의 경제상태라는 우리의 불우한 생활조건에서 나도 사람인 이상 이에 일말의 동정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생명은 절대적인 것이요, 생활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임을 알아야 한다.
부유한 나라에는 자살이 없는가? 물론 있다. 얼마든지 있다. 북유럽의 덴마크는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이면서도 최대의 자살국이 되어 있다. 수도 코펜하겐에서만 매일 세 사람이 자살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도리어 생활의 안락함으로 인해 자살하고 있다. 나는 이 역시 인류의 생명력 저하로 간주한다.
이뿐인가? 오늘날 인류는 산아제한 운운하면서, 생명의 가능성 내지는 태아까지 공공연히 정치의 이름으로, 행복추구의 명분으로 무수히 죽이고 있다. 이야말로 핵전쟁이 다른 형태로 방향을 전환한 것 아닌가? 우리 사이에서도 이런 일이 속속 준비되고 있다.
그러나 미움을 살인으로 규정하는 하나님 앞에서는 이 또한 살인이 아니던가? 이 역시 인류의 생명력의 저하에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여기에서 말하는 생명력이란 도덕적인 생명력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의 생명은 개, 돼지의 그것이 아니고 도덕적인, 영적인 것이다.
오늘날 인류는 개, 돼지의 자연적인 본능 생활에 떨어져 도덕적인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 자식을 죽인 여성은 물질 앞에 생명의 존엄성이나 절대성은 차치하고, 고귀한 모성애마저 팔아먹은 것이다.
반대로 덴마크인의 자살은 통계상으로 고독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심하게 말하면 할 일이 없어서 죽는 것이다. 이웃 나라 일본에도 인생이 허망하다고 죽는 지식 계급이 수두룩하다. 결국 이는 다 도덕적 생명을 물질적 이기주의 앞에 팔아먹은 현대인의 가엾은 말로(末路)이다.
도덕의 절정은 희생적인 사랑이다. 인류가 이상적인, 도덕적인 정치적 노력을 다하고도 인구 문제로 곤경에 있다면 동정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정치문제 이상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인류야말로 괴테 말대로 시궁창에 코를 틀어박은 존재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자녀를 적게) 둘, 셋(만을) 낳아서 훌륭한 교육을? 무슨 교육인가? 사람을 죽이고 나만 살자는 교육인가?
우리에게 문제와 어려움이 있는 것은 다 하나님의 섭리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우리의 도덕적인 자각과 진보와 발전, 특히 사랑의 상승을 기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1961년 11, 12월 盧平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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