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윤동주
(1942.1.24)
윤동주의 시에서 가장 두드러진 어휘는 부끄러움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며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온 그에게 달리 참회할 무엇이 있었을까?
이 시는 그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준비하던 1942년에 씌어졌다. 이 무렵 우리 민족이 처한 상황은 참으로 암담한 것이었다. 1941년 조선어 사용은 전면 금지되었고 각종 악법이 공포되는 한편 마침내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여 전시체제로 돌입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는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유학을 결심하는데, 수속을 밟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할 수밖에 없었던 굴욕감이 이 시에 배어들었을 것이라고 이숭원 교수는 설명한다.
시인은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본다. 쇠락한 우리 민족 역사의 어느 한 시점에 놓여있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시인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를 묻는다. 그러나 이것은 망국민으로서의 자괴감이라기보다 식민지 청년으로서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데서 오는 부끄러움이다.
이 반성적 어조가 2연과 3연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먼저, 시인이 참회하는 것은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찾아올 ‘그 어느 즐거운 날’에는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를 또 참회해야 할 것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나라가 이 지경에 처해있는데 이 나이가 되도록 뚜렷한 목표도 희망도 없이 살아온 자신을 반성하는 것만으로 속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날’이 오면 젊은 시절 그렇게 부끄러운 고백만 할 뿐 해방을 위해 좀 더 적극적인 행동을 하지 못한 자신을 또 참회하게 될 것이다. 일제가 그렇게 쉽게 패망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친일을 했다는 어떤 시인의 말과 비교가 되는 대목이다.
해방 이후 진정한 참회록을 썼던 이가 과연 얼마나 되나? 구구한 변명들만 늘어놓지는 않았던가. 그런데 윤동주 시인은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고 말한다. 참회할 일을 많이 만들지 않겠다는 뜻도 있겠지만 구차한 변명도 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자세라고 하겠다
“한 사람이 자신의 살아온 기간을 정확히 말할 때에는 그의 삶의 중요한 고비에 봉착했을 때”라는 이숭원 교수의 말이 생각난다. 전쟁 발발 직후 가족의 만류를 무릅쓰고 유학을 결심하던 윤동주의 심중은 어떤 것이었을까? 시인의 촉수는 이것이 사지(死地)로 가는 길임을 예감한 것일까, 아니면 죽을 각오로 어떤 결심을 하고 일본으로 향한 것일까? 이 시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는 구절은 그가 온몸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집요함을 보여주거니와, 그렇게 하여 그가 발견한 것은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다. 그가 오랜 고뇌 끝에 내린 고독한 결단의 한 자락이 잡힐 듯하다.
1943년 7월 귀향 직전에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 중 일제의 생체실험 대상으로 희생된 시인. 1917년 북간도에서 출생하여 1945년 28세를 일기로 일본에서 운명한 민족시인 윤동주의 넋은 아직도 외롭다.
글: 정 희 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