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에 푹 빠진 일본인들

일본열도 서남부 끝자락에 위치한 규슈지방은 예부터 지리적 근접 성 때문인지 한반도와 역사적·문화적으로 특별한 관계를 맺어왔 다.

지금도 한국과의 인적 물적 교류가 일본의 어느 지역보다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부산광역시와 후쿠오카시가 경제,문 화,관광 등의 분야에서 호혜적인 협력관계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규슈에는 일한친선협회,무궁화회,나들이회,한우회,현해인 클럽 등 한국과 관계되는 민간 친선단체가 열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 중에서도 '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이라는 이색적 인 연구회가 유독 눈길을 끈다.

윤동주는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암울한 일본제국주의 통치시대에 우리말로만 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를 엮어낸 저항시인이?

그는 일본 유학 중에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조국의 광복을 불과 반년을 앞둔 1945년 2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서른도 안된 풋풋한 나이에 바람처럼 스러져 갔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 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로 시작되는 그의 '서시'에 가슴 뭉클한 감동과 아픔을 느끼지 않은 한국인은 없으리라. 윤동주의 시는 민 족을 초월한 인간애와 순수성으로 인해 영어,독어,프랑스어로 번 역되어 세계에 소개되고 있다.

놀랍게도 1994년 후쿠오카에서 한국문학을 전공한 니시오카 겐지 교수가 중심이 되어 '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이 만들어졌다.

20,3 0여명의 회원이 매달 한번씩 모여 윤동주의 작품 한편을 골라 음 미하고 행간에 숨어 있는 진정한 의미를 파내는 즐거움에 시간 가 는 줄을 모른다.

회지 발간,연락에 필요한 경비는 회비로 충당한 다.

비단 이뿐만 아니다.

해마다 윤동주의 기일인 2월 16일에는 회원들이 후쿠오카 형무소 옛터에 모여 조촐한 위령제를 지낸다.

가끔은 연세대학교 교정에 있는 윤동주의 시비 앞에서 추모의 모 임을 갖기도 한다.

이 같은 모임의 맥이 이어지고 있는 데는 마나 기 미키코라는 여기자의 윤동주에 대한 순애(純愛)가 단단히 한몫 을 하고 있다.

책 한 권이 훨씬 넘는 토의록을 매끄럽게 정리하여 배포한 일도 마나기 대표의 헌신의 결과이다.

여담이지만 1985년 4월 용정에 있는 윤동주의 묘를 처음으로 찾아낸 사람도 한국인 이 아닌 와세다 대학 오무라 마스오 교수라는 일본인이었다.

일본 사람들의 지적 호기심과 학습욕은 단연 금메달 감이라는 것 은 익히 알고 있지만 그들이 한국의 국민적 시인인 윤동주의 짧았 던 생애에 가슴 아파하고 일제의 폭압을 부끄러워하면서 그의 시 를 철저하게 탐구하는 정기적인 연구 모임을 갖고 있다는 것을 처 음 알았을 때는 절로 고개가 수그러지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9월 25일 후쿠오카에서 개최된 100번째의 모임에 초대받았다 . 후쿠오카 총영사 재임 중에 41번째의 연구회를 관저에서 갖고 회원들을 격려한 인연이었다.

매년 가을에 후쿠오카시가 시민과 함께 펼치는 '아시아 월간 행사'의 하나로 열린 이 날의 모임에는 회원 및 일반인 40여 명이 참석하여 세 시간에 걸쳐 '자화상'이 라는 작품을 진지하게 토론하였다.

한국인의 참석자는 나를 포함하여 고작 세 사람뿐이었다.

일본에 서 널리 알려진 70대 후반의 모리사키 가즈에 여류 작가와 82세의 '문학청년'이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토론에 참가하는 모습을 옆 에서 지켜보면서 왠지 부끄럽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윤동주 를 배출한 한국의 어디에 이런 모임이 있으며,그것도 10년 씩이나 계속하고 있는 시민의 모임이 있을까.

'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의 후쿠오카 회원들은 윤동주가 관부 연 락선에 몸을 싣고 유학 길에 올랐던 길목인 부산에서 그의 시를 사랑하는 부산 시민들과 더불어 시를 읽는 모임을 한 번이라도 갖 기를 소원하고 있다.

후쿠오카와의 교류가 질량면에서 날로 확대, 심화되고 있는 이곳 부산에도 윤동주의 시를 사랑하는 모임이 결 성되어 마음과 마음으로 이어지는 시민교류의 물꼬가 트이기를 기 대하여 마지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