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받은 자의 생활” 히브리서 10:19-25
죄 사함을 받고, 새 생명을 얻은 사람들의 생활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오늘 본문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던 사람들에게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께서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 길은 우리를 새롭게 해주고 죄 아래에서 죽었던 우리의 생명을 소생하게 해주는 길입니다. 누구든지 예수에게 오면 지금까지 그를 묶고 있던 죄의 사슬에서 풀려난 자유인이 됩니다. 더 이상 죄가 그를 지배하지 못하는, 죄의 세력에 끌려 다니지 않는 자유인이 됩니다. 여러분과 나는 바로 이런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자유의 힘이 얼마나 큰지 생각해보십시오. 공산주의를 내세우며 인간의 자유를 억압했던 나라들이 100년이 지난 오늘날 어떻게 되었습니까? 공산주의 이론은 참으로 그럴듯합니다. 그러나 저들이 자유를 억압하고 통제한 결과는 인간의 능력을 극도로 축소시켰고 결국은 낙후한 국가로 전락시키고 말았습니다. 대표적은 경우가 남한과 북한의 경우입니다. 일례로서 해방 후에 남한도 북한도 토지개혁을 했습니다. 남한은 국민이 자유롭게 땅을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고 자기가 농사짓는 땅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했다고 자랑하지만 사실은 공산당이 지주들에게서 땅을 빼앗아서 전 국민을 땅의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북한 주민들은 땅의 소유주가 아니라 자기가 속한 땅을 경작해서 국가에 바쳐야 할뿐만 아니라 그 땅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는 노예가 된 것입니다. 지금도 공산당이 발급해주는 통행증이 없이는 그 사람이 살도록 정해진 지역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자유가 있는 남한과 자유가 없는 북한의 차이를 온 세계는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능력이 많고 가능성이 크면 뭘 합니까? 자유가 없는 상태에 있는 사람은 사람으로서의 제 기능을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죄의 노예가 되어서 죄책감에 시달리며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혀 숨어사는 도망자와 같은 상태에 있다면 그 사람이 무엇을 제대로 할 수가 있겠습니까?(ex. 세종시대의 장 영실) 우리가 자유인이 되었다는 말은 우리에게 굉장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과 내가 이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자신 있게 할 수 있으며 또한 우리가 하는 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남한에 온 탈북자들이 자유를 얻은 것에 감격하고 고마워해야지 먹고 사는 일이나 풍요를 누리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면 남한에 온 그들의 삶은 의미가 없습니다. 미국에 와서 살고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어진 자유를 소중하게 여겨야지 물질의 소유에만 집착한다면 미국에서 사는 삶이 의미가 없습니다. 물론 물질에 대한 자유, 가난으로부터의 자유 역시 자유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풍요가 반드시 자유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물질적인 풍요가 인간을 욕망과 쾌락의 노예로 만들기도 합니다. 물질적인 풍요와 자유는 그 가치를 서로 비교조차 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의 자유도 이렇게 소중한데 하나님 앞에서 얻는 자유가 얼마나 더 소중한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얻는 자유는 죽음 앞에서 누리는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죽음은 절대의 것이며 무서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인간들은 죽음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삶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영원히 살 것처럼 헛된 꿈을 꾸느라 죽음을 준비하지도 못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로 인하여 죄 사함을 받고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유인이 되었다고 제멋대로 살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자유를 얻은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네 가지를 하라고 권면합니다. 믿음을 지킬 것, 소망을 굳게 잡을 것,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할 것, 그리고 모이기를 폐하지 말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만들지 말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살며 교회 생활을 계속하라는 것입니다. 이 법은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자유를 더욱 견고하게 하고, 완전에 이르도록 해주기 위한 법입니다. 믿음을 지켜야만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 연결될 수 있습니다. 소망을 굳게 붙잡을 때에만 죄의 세력인 죽음의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고 자유로운 미래, 죽음 너머에 있는 미래를 앞당겨 살 수 있습니다. 사랑과 선행을 실천할 때에만 죄의 근원인 욕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생활을 지속해가기 위하여 교회로 모여야만 합니다.
예수를 믿고 죄 사함을 받고 자유를 얻었으니 이제 더 이상 교회로 모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 이미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되지 말라고 본문은 경고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여전히 모이기를 계속해야 하는 이유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인간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연약한 짐승들은 사나운 맹수의 공격을 피하기 위하여 떼를 지어 다닙니다. 그런데 자기 무리로부터 벗어나서 혼자 있는 짐승이 언제나 맹수의 공격 대상이 되고 맹수의 먹이가 됩니다. 모이는 일을 게을리 하는 사람은 믿음의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 혼자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쉽게 악한 마귀의 표적이 되고 먹이가 됩니다. 세상에 흩어져서 세상의 말 속에서 사노라면 온갖 유혹을 받게 되고 믿음에서 떨어지기 쉽습니다. 근심 걱정과 불안으로 가득 찬 세상의 소리만 듣다보면 소망을 잃어버리기 십상입니다. 간교하고 악한 세상일에 파묻혀 살면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불가능해집니다. 이렇게 되면 한 순간에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지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죄의 노예로 전락해버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지지 않기 위하여 자신은 “매일 죽는다.”고 고백했습니다. 종말이 가까워 올수록, 이 땅의 삶이 단축되면 될수록, 우리의 삶이 고달프면 고달플수록,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딴 마음을 품지 말고 쓸데없는 생각을 버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하나님 앞에 이르게 될 그 날까지, 모이기를 힘쓰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생활을 실천하는 여러분과 내가 되기를 원합니다. 11/8/15 한영숙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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