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워하지 말라” 누가복음 2:8-14
인간은 모두 마음속 깊은 곳에 두려움을 품고 삽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목자들처럼 그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들 때문에 불안할 때도 있고, 마치 출애굽 한 이스라엘 민족이 추격해오는 적군을 뒤로하고 홍해 앞에 섰을 때와 같은 현실에 직면하여 공포에 휩싸일 때도 있습니다. 그 공포의 강도가 어떠하든지 그것은 모두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강력한 힘입니다. 지금도 세계인은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테러의 위협 때문만이 아니라 경제적인 위기에 처할까봐 더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금리 인상 소식과 함께 세계 각국이 처하게 될 경제 사정이 좋지 않을 것이라는 소식 때문에 세계인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나는 많은 가게들이 문을 닫기도 하고 새로 열기도 하는 맨하탄의 거리를 지나다니면서, 가게가 문을 닫기까지 그 주인이 겪었을 공포와 새로운 가게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직면하고 있을 두려움을 생각해보곤 합니다. 가게가 있던 땅은 그대로인데 그 가게의 주인이 바뀌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경제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시장이란 치열한 생존 경쟁의 현장입니다. 시장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와 같아서 끊임없이 변하고 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대상을 도태시키면서 주인을 바꿔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있는 현대 사회에 빠르게 적응해야 하는 현대인들은 더 큰 불안과 공포에 휩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때문에 현대인은 신경성 질환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현대인의 질병은 모두 “스트레스 때문이다”고 의사들은 진단을 합니다. 사실은 이 말은 “그 질병의 내용이나 원인을 모른다”는 말이지만 아무도 그 말에 토를 달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겪고 있는 스트레스, 불안과 공포가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비단 현대인만이 아닙니다. 인간은 태어나서 두 살이 될 때부터, 즉 무엇인가를 의식하고 기억하기 시작할 때부터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인식한다고 합니다. 생존을 위협하는 죽음이라는 것이 거대한 힘으로 인간을 불안과 공포로 몰아넣습니다. 공포에 저항하면서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자아를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두려움에 저항하고 두려움을 몰아내기 보다는 그 두려움을 감추거나 두려움으로부터 도피하려 애쓰고 때로는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엉뚱한 일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불안과 공포로부터 도피하기 위하여 술과 마약에 취하기도 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합니다. 혹은 자신이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하기 위하여 엉뚱한 사람들을 비난하기도 하고(정치가나 지도자, 혹은 부모) 누군가를 중상모략하기도 하고 불특정 다수를 향해 행패를 부리기도 하고 어처구니없는 떼를 쓰기도 합니다.
이런 현상은 불안과 공포에 맞서 싸울 용기가 없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비겁하고 용기가 없는 사람들, 약하고 사악한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자아의 모습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고 비방하고 능욕하고 교만하고 자랑하고 악을 도모하고 부모를 거역하고 우매하고 배약하고 무정하고 무자비한 자라” 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의 이 모든 악은 근본적으로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사람들,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죽음의 공포를 이길 힘이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인간을 위협하는 죽음을 이길 힘이 인간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토록 참담한 인간의 현실에 한 줄기 빛이 임했다고 신약성경은 외치고 있습니다. (구약은 그 빛이 임할 것을 희망하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빛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본문은 두려움에 떨고 있던 목자들이 세상에 임한 빛에 대한 첫 번째 증인들이었음을 보도합니다. 두려움에 떨던 목자들이 밝은 빛 아래에서 들려온 천사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목자들은 천사가 전해주는 말을 믿고 달려가서 베들레헴 마구간의 구유 안에 강보에 싸여 뉘인 아기 예수를 만났습니다. 특별할 것이 없는 사람들, 지극히 평범한 목자들이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의 첫 번째 증인들입니다. 당시의 권력자들, 즉 헤롯 왕이나 유대교의 지도자들이나 로마의 집권자들에게는 마구간에서 태어난 예수는 결코 시선을 끌만한 인물이 못됩니다. 구유에서 태어나 길에서 살다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자신의 구세주라고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더욱이 세상에서의 성공을 하나님의 뜻으로 믿었던 유대인들에게 예수에 관한 소식은 말도 되지 않는 스캔들일 뿐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보아온 인간들의 악함과 잔인함 때문에 혹은 자신이 경험한 자기 자신의 약함과 무력함 때문에 인간에게 절망하는 사람들, 그리하여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만 희망을 걸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소식은 복음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모든 노력이 끝난 자리, 인간의 자랑이 멈춘 자리, 인간의 희망이 사라진 자리, 죽음의 자리, 십자가에서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은 더 이상 두려움의 노예가 아닙니다. 그는 두려움의 한 복판에서도 예수께서 누리셨던 평화, 죽음을 이긴 평화, 십자가 위에서 누리신 평화,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없는 평화,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평화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누릴 평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12/20/15 한영숙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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