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줄을 믿노라” 로마서 6:6-11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이 날의 의미는 2천 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서 살았던 예수라고 하는 한 인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3일 만에 다시 살아난 사실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은 예수가 정말 다시 살아났느냐’ 하는 질문에 대답하려고 노력해왔습니다. 공관복음서가 전하고 있는 빈 무덤 이야기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를 장사했던 무덤이 비어 있었다, 그러니까 예수는 틀림없이 부활했다.” 거나 혹은 천주교회가 “예수의 시신을 쌌던 천이 발견 되었으니 예수의 부활은 사실이다.” 고 하는 말들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을 변증하려는 어떤 노력도 예수의 부활을 입증하지는 못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런 말을 들어도 여전히 믿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누군가가 예수의 시신을 가져갔다”고 하는 요한복음에 수록된 마리아의 말입니다. 예수 부활의 의미를 시간과 공간에 예속된 역사적인 사건에서 찾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 부활의 참 된 의미는 부활하신 예수로 인해서 오늘 지금 여기 앉아 있는 “내가 죽고 다시 살아났다”는 데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죄인이었던 내가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고, 부활하신 예수와 함께 하나님 안에 있는 나로 다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내 자신의 힘으로는 죄의 사슬에서 풀려날 수 없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고 새 생명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말입니다. 세상이 무어라고 해도 나 자신이 그 증인이기 때문에, 내 삶이 그 증거이기 때문에, 너무도 분명하고 생생한 나의 증언이기 때문에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를 내가 만나기 때문에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습니다. “내가 예수로 인해 부활했다” 는 말이 내가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다는 말입니다.
예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는 체험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자신이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죄의 굴레에 매여 있다고 하는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환자에게 의사가 필요한 것이지 자신이 환자인 줄 모르는 사람에게 의사는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제각기 자기만의 고통과 고난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기를 얽어매고 있는 죄의 사슬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각자의 죄 짐을 지고 십자가 위의 예수에게 오면 자신의 죄가 사라지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누가복음이 전하는 십자가 우편의 강도처럼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 강도는 크게 기대하지 않고 십자가 위의 예수에게 자기를 기억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용서를 받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내가 최근에 알게 된 신동혁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14호 수용소 탈출” 이라는 책의 주인공입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북한의 14호 정치범 수용소에서 죄수로 태어났습니다(북한의 연좌제).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10대에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로 모범수라는 이유로 간수들이 부부로 만들어주었고 그 사이에서 동혁이 태어났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이 늘 배고픔과 구타에 시달리는, 짐승이나 노예보다 못한 것이었지만 죄수로 태어났기 때문에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던 중에 새로 들어온 죄수로부터 수용소 밖의 소식을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는 세상이 있다는 말에 탈출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과 함께 탈출을 시도했는데 그 사람은 탈출 과정에서 죽었고 자기만 살아남아서 대한민국에 올 수 있었고 지금은 북한 인권, 특히 정치범 수용소 철폐를 위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지금도 해결하지 못한 괴로움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어머니와 누나가 탈출을 계획한다는 사실을 고발해서 죽게 만든 일입니다. 어머니, 아버지라는 말이 있으니 그 말을 사용했을 뿐 사랑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그는 수용소 간수들의 가르침대로 탈출을 시도하는 사람을 고발하면 상(한 끼의 식사)을 받을 줄로 여기고 자기 어머니와 형을 고발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상을 받지도 못했고 어머니와 형의 죽음을 목도해야 했고 자신과 아버지도 혹독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바깥 세상에 나와서 가족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가족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를 알게 된 그에게 어린 시절의 일은 죄책감과 괴로움으로 지금도 그를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그를 인터뷰 하는 사람들이나 그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에게 그의 고통은 흥밋거리일 뿐이지만 그 자신에게는 지울 수 없는 과거이고 용서받아야 할 죄입니다.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그가 예수를 만나면 용서를 받은 새로운 자아, 부활의 새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그는 자기를 수용소에서 태어나게 하시고 온갖 고난을 겪게 하시고, 그곳을 탈출하게 하시고, 그의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이 사람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오늘 우리 한국인들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일전에 뉴욕의 일간지에 난 광고를 보았습니다. 그 내용이 모두 기억나지는 않지만 내 눈에 들어온 글 중에 대한민국의 현 상황을 OECD 국가들과 비교하며 한국정부를 비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한국을 비난하려면 북한과 비교해야지 OECD 국가들과 비교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대한민국은 건국 된지 70년, 식민지 노예였던 나라가 아닙니까? 지금도 북쪽에서는 동족이 굶어죽고 얼어 죽고 매 맞아 죽어가고 있는 데, 대한민국이 OECD 국가들처럼 되지 못했다고 불평을 늘어놓는 한국인들의 양심은 화인 맞은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온 나라가 미친 듯이 열을 올리고 떠들면서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쥐죽은 듯 조용하기만 한 한국인들을 어떻게 죄 없다고 한단 말입니까? 위안부 문제는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북한 인권 문제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위안부 문제는 70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양심에 관한 문제입니다. 당시에 위안부로 끌려가던 여인들을 위해서 소리를 내야 했던 사람들은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이기에 이 문제는 남들(이미 죽고 없는 자들)의 일입니다. 그러나 북한 인권 문제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동족의 일이기에 한국인의 일이고 동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일입니다.
신동혁 씨를 인터뷰하는 기자조차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질문하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문제가 나의 문제라는 의식이 한국인들에게 없습니다. 이 얼마나 큰 죄악입니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고 물으시는 하나님의 질문 앞에 한국인들은, 심지어 한국 교회까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라고 대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민족이 부활의 생명을 얻기를 원한다면, 통일된 자유의 나라를 얻기 원한다면 한국인들은 회개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위안부 문제 같은 것에는 열광하면서 북한 인권 문제에는 침묵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악한 죄악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우리 한국인들의 추한 모습을 예수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솔직하고 정직하게 우리 한국인들의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 때에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미래가 열릴 것입니다. 3/27/16 한영숙 목사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