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중에서” 열왕기상 19:1-18
갈멜산 위에서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맞서서 싸워 이기고 3년 6개월간 비가 오지 않았던 이스라엘 땅에 비를 오게 한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이세벨에게 쫓기어 도망을 갔습니다. 지치고 기진맥진한 엘리야는 이스라엘 국경을 넘어서 유대 땅 사막 지역까지 들어가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차라리 나를 데려가 달라고 하나님께 투정하며 지쳐서 잠들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시어 먹을 것을 주시고, 힘을 주시어 호렙산으로 올라가게 하십니다. 그러나 호렙산에 도착한 엘리야는 여전히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갈멜산에서 그토록 용감했던 선지자 엘리야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습니다. 그 모든 용기를 다 잃어버리고 호렙산 굴속에 숨어 무기력하게 지내는 한 사람의 도망자로 변해 있습니다.
무너진 이스라엘 12지파의 단을 쌓고 간절히 기도하여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제물과 제단을 불사르게 했던 엘리야의 담대한 믿음은 어디로 갔는지, 그는 지금 한 낱 도망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엘리야는 믿음의 용기를 잃어버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단절된 고독 속에 빠져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자기를 잊어버린 것처럼,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엘리야는 절망 속에 빠져 있습니다. 그에게는 삶의 용기도 희망도 의미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를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절망에 사로잡혀 있는 엘리야를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에 있느냐?” 고 물으시는 하나님께 엘리야는 대답하기를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특별히 열심인데, 내 민족이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모두 죽였으며, 나 혼자 남았는데 저희가 나까지 찾아 죽이려고 합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세상에 의지할 동지가 하나도 없고 나 혼자 남았는데 내 생명을 지킬 힘이 내게는 없다’는 대답입니다.
엘리야는 지금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사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엘리야도 역시 인간입니다. 그는 자기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에 의해 자신이 처한 현재의 사태를 절망으로 보고 있습니다. 자기 민족이 하나님을 버렸고 자기 외에 단 한 사람도 남은 자가 없으니 이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세상이 모두 바알 신의 지배 안에 들어가 버렸고 늙고 힘없는 자기 한 사람만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엘리야가 낙심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 지배가 끝났다는 느낌이요,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고 느끼는 자의 고독이요, 허탈감입니다. 이제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죽음 밖에는 없다는 공허와 좌절감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엘리야가 생각하는 것과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굴 밖으로 나가서 하나님을 기다리라고 명하신 후에 엘리야를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크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아니라, 천지를 진동하는 지진이나 불같은 소리가 아니라, 작고 세미한 음성으로 엘리야를 찾아 오셨습니다. 간절히 사모하며 귀기우려 듣지 않으면 듣지 못할 소리, 작고 미세한 음성으로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혼란과 격동을 잠재우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천둥 번개와 같은 혼란과 격동이 잠들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길 준비가 되어 있을 때에, 조용한 침묵이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게 될 때에, 인간은 자신을 향해 말씀해 오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토록 간절히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던 엘리야에게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은 엘리야의 당면 과제를 해결해 주시겠다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즉, 기적으로 이세벨을 처치해 주겠다거나 엘리야를 죽이려는 원수들에게 보복을 해 주겠다는 약속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가 전혀 예기치 못했던 새로운 일 꺼리를 주셨습니다. 장차 이스라엘과 이웃나라의 왕이 될 사람들에게 기름을 부을 것과 엘리야의 후계자가 될 선지자를 세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로 하여금 또 다시 위험하고 힘든 삶의 현장으로 내려가라는 요구였습니다. ‘이제는 내 할 일을 다 했고 더 이상 할 수도 없다’고 낙심하며 도피해 있는 엘리야를 하나님은 역사의 현장으로 돌려보내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요구가 너무 심한 것 같습니다. 왜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휴식이나 안식을 허락하지 않으시는지, 왜 하나님은 엘리야가 원하는 보복을 해주지 않으시는지, 왜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유난히 힘든 삶을 살도록 하시는지, 왜 하나님은 자기의 사람에게 이렇게 하시는지, 이토록 냉정하신지,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신 자를 어떻게 하셨던가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독생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은 가장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엘리야가 당한 고초가 아무리 힘겨웠어도 예수의 그것과 비교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자기의 사람들을 부르시는 것은 배부르게 먹고 공짜로 남의 덕에 평안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사람들을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하자고 부르신 것입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자가 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배부른 돼지처럼 잘 먹고 생각 없이 살아가라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본래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것은 본능적인 욕심이나 채우면서 동물적인 만족 속에서 살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을 돌보고 다스려야 하는 일, 즉 하나님의 일을 맡기기 위해서 인간을 지으셨고, 하나님이 이루실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도록 특별히 자기의 사람들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여러분과 내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생존의 위협을 받는 고통이 있고, 세상에 홀로인 것 같은 고독이 있고, 아무런 소망도 의미도 없다고 하는 생의 좌절이 있을 때에도 우리를 지으시고 부르신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향해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 조용한 침묵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라는 고난의 삶을 요청 받았을 때에 우리를 믿어주시고 특별히 선택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그리스도의 흔적이 없다면, 즉 십자가의 고난이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맥추절은 하나님의 백성이 고난 중에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온 날입니다. 보릿고개를 넘기는 사람들, 죽음의 위협에 처한 사람들이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첫 번 추수를 감사하는 날이 맥추절입니다. 우리가 직면하는 고난 중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참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6/26/16 한영숙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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