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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ropolitan Koryo United Methodist Churc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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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t : 737 date : 2016-07-12 10:37: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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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나라에서” 골로새서 1:13-14
우리가 어두움의 세력 아래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예수로 인해서 구원을 얻기 전에는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왜 내가 죄인이냐고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적절한 대답을 해주고 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입니다. 여리고로 가는 길에서 강도를 당한 어떤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던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신 후에 예수께서는 강도당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준 사람이 누구인지를 질문하신 후에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고 대답을 하셨습니다. 이 비유는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고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아주 간단하고 쉬운 일입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도처에 널려 있고 그들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지는 자명합니다. 이 자명한 일을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이 자기의 이웃이 누구인지를 모르거나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인지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일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충돌하지 않는다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개는 이 둘은 충돌하게 되어 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하여 지나갈 수밖에 없었던 제사장이나 레위 인처럼 말입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제사장이나 레위 인이 유난히 악했기 때문에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해 간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갈 길이 바빴을 수도 있고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란 말입니다. 이 일은 마치 더러운 옷을 입고 더러운 짐을 잔뜩 들고 지하철 의자에서 잠들어 있는 홈 리스 옆 자리에 앉아서 그 사람의 말 상대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는 것과 같고, 버스를 타려던 홈 리스가 아무도 그가 버스에 오르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의 위세에 눌려 버스를 타지 못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지난 주간에 일어난 사건들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총기를 소지하고 있는 흑인 운전자가 총기 면허증을 꺼내기 위해서 손을 움직이려 했을 때에 그 운전자의 팔을 향하여 경찰이 총을 쏘게 된 일이나, 체포 과정에서 저항하는 흑인이 ‘총을 소지하고 있다’는 여성의 외침을 듣고 경찰이 그대로 그 흑인을 쏘게 된 일도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의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해간 사람들의 경우와 같다는 말입니다.
총에 맞아 죽은 흑인들이 억울하다고 소리칠 수도 있지만 경찰은 업무 수행 과정에서 정당한 행위를 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경찰이 의도적으로 흑인을 죽인 것이 아니라 실수였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그 일이 일어난 것이 누구의 잘못인지를 밝히고 그에 합당한 벌을 받도록 하는 사법제도가 미국에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북한이나 중국과 같은 독재 국가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미국인들은 이 일을 법에 호소하기보다 대중의 여론에 호소하고 사법부의 판단을 기다리기보다 군중의 힘으로 공권력을 굴복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걸핏하면 거리로 몰려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들은 미국의 사법부가 너무 썩어서 법으로는 결코 정의를 실현할 수 없다고 여기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인간 세상에 완전한 것은 없습니다. 사실은 미국의 사법부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을 선동해서 길거리로 몰려나가게 만들고 대중에게 호소하여 표를 얻으려는 정치가들에게 원인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결국 흑백 갈등을 부추김으로서 이익을 얻으려던 정치가들의 선동 선전은 경찰관 5명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데까지 이르게 만들었습니다. 이 문제는 총기규제의 문제도 아닙니다. 정말로 법이 정당하지 못하다면 법으로 해결할 수 없다면 공권력을 신뢰할 수 없다면 국가가 어떻게 지탱될 것이며, 그 국가를 믿고 살아야 할 국민의 삶은 누가 지켜줄 수 있을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악법도 법이기에 지켜야 한다.’며 독배를 마셨던 희랍의 철인 쏘크리테스를 떠올리게 됩니다. 아마도 여러분 중에는 억울한 사람의 한풀이를 해주기 위해서 사람들이 길거리로 나서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고 질문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억울한 일을 겪지 않는 인생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흑인이기 때문에, 한국인이기 때문에, 혹은 백인이기 때문에 억울한 것이 아니라 인생이란 언제나 그런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세상의 그 누구도 ‘나’ 자신만큼 나 자신을 알 수 없고 나 자신처럼 나를 생각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모두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가는 고독한 존재입니다. 인간에게 참 사랑은 없습니다. 즉, 자기를 알지 못하는 사랑, 자기를 희생하는 절대적인 사랑을 인간에게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인간은 그토록 쉽고 분명한 일, 즉 사랑을 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모두 죄인입니다. 사랑해야 할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해야 할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 인간은 모두 죄인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사랑하는 대신에 자신의 욕심과 물질을 사랑하는 죄인입니다. 인간은 죄인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하나님이 주신 계명,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죄인입니다. “사랑하라”는 계명이 우리가 죄인임을 가르쳐주고 있으며, 자신이 피조물임을 가르쳐주고 있는 자신의 양심이 자기 자신을 죄인이라고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죄인에게는 형벌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죄인이 받는 죄의 값으로 주어지는 형벌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죄 때문에 죄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은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보다 못한 슬픔과 고통 속에 있습니다. 누군가를 향한 분노와 증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은 결코 축복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못하고 이웃을 사랑하지도 못하는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께서 희생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 예수로 인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예수를 믿는 우리를 “죄 없다” 고 선언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흑암의 세력에서 건져내시어 자기 아들의 사랑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예수의 나라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이 여전히 억울하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저주가 아니며 형벌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여러분과 내가 되기를 원합니다. 7/10/16 한영숙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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