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의 요구” 누가복음 14:26-27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아주 오래 전에 이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공관복음서 모두에 실려 있어서 복음서를 가지고 설교를 하게 되면 거의 매년 설교를 해야 하는 본문입니다.) 본문에 충실하게 설교를 했는데 교인 한 분이 내 설교를 듣고 그 다음 주부터 출석을 하지 않았습니다. 심방을 갔을 때 그 분은 ‘그런 식으로 예수를 믿어야 한다면 자기는 교회에 출석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오늘도 이 본문으로 설교를 준비하면서 누군가 그 때 그 사람처럼 시험에 들지는 않을지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일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특히 초대교회가 박해의 상황에 있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오늘날에도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나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까운 나라로 북한이 있습니다. 북한에서 예수를 믿겠다는 것은 부모 형제를 미워하는 일이며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일입니다. 자기가 예수를 믿음으로 인해서 자기와 가족을 포함해 3대가 멸족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나 내가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면 과연 우리는 예수를 믿겠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러면 이 본문은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해당이 안 되는 말일까요? 교회에 다니고 예수를 믿으면 도움을 받게 될 뿐 해를 입을 까닭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미국에서는 교회를 찾아와서 망명신청을 하는데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도 있고 영주권을 얻는 방편으로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구체적인 이익을 바라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고 천당에 간다는 기복신앙에 매달려서 교회생활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은 한국 교인들과는 상관이 없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를 따르고 교회 생활을 하면 할수록 자기희생을 요구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또한 교회를 위해서 우리는 희생을 요구받습니다. 예수께 가까이 갈수록, 교회의 중책을 맡을수록 요구받는 희생은 점점 더 커집니다. 예수께서 요구하는 것은 사랑이고 그 사랑은 자기희생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세상 안에 존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예수를 믿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나무에 접붙여지는 가지와 같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면 자기희생의 사랑을 요구받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아주 좋은 예 하나를 소개합니다.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요구했던 희생입니다. 빌레몬서는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만난 오네시모를 위해서 빌레몬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금전적 손해를 끼치고 도망을 친 노예였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용서해주고 그를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라고 요구합니다. 만약 그가 갚아야 할 빚이 있으면 바울 자신이 갚겠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이러한 요구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빌레몬이 바울 자신과 함께 예수의 제자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의 이름으로 빌레몬에게 희생을 요구한 것입니다. 바울은 스스로 그 희생에 동참함으로 본을 보입니다. 오네시모의 빚을 자신이 책임질 뿐만 아니라 자기가 빌레몬으로부터 받아야 할 부채까지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위한 희생, 즉 예수를 위한 희생, 교회를 위한 희생에 동참해달라고 빌레몬에게 요구했습니다. 바울에게는 빌레몬이 자기의 부탁을 들어 주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예수를 향한 믿음과 사랑이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와 같은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믿는 자는 서로를 향해서, 예수를 믿는 믿음을 전제로 희생의 사랑을 요구할 수 있는 공동체입니다. 혈연의 가족 간에도 불가능할 수 있는 일이 가능한 곳이 교회입니다. 물론 이 사랑의 요구는 강압이나 억지, 혹은 무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있어야 하며,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의 행위는 자유로운 의지의 결단이어야 합니다. “죄인인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 그의 사랑에 감격하여 나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된 나”에게 오늘 본문의 말씀은 거리낌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사랑에 보답하며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해주는 고마운 말씀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갚을 것이 없는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오늘도 내게 주어진 믿음의 분량대로, 내가 할 수 있는 희생의 사랑으로 섬기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9/4/16 한영숙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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