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폴리탄 한인 연합감리교회 설교 모음



Metropolitan Koryo United Methodist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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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t : 698 date : 2016-09-22 07:35:25
NAME :    mkumc
SUBJECT :    용서받은 죄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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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받은 죄인들”  디모데전서 1:12-16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확실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죄인 중의 괴수와 같았던 자신이 죄 사함을 받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핍박하고 그의 교회를 잔해하려 했던 자신을 용서하시고 예수를 전하는 사도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죄 사함을 받았다는 확신이 없이는 사도 바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죄인이었다고 하는 바울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울이 말하는 죄가 무엇이며 왜 그가 죄인이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스스로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한 이유는 그에게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유대교나 로마의 법을 어긴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도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종교적인 신념에 충실했고 그 신념을 따라 기독교회를 핍박했을 뿐입니다. 그러한 바울을 죄인이라고 말할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죄인 중에서도 가장 악한 죄인이었다고 자신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스스로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한 이유를 알려주는 좋은 예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수록되어 있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어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자기 몫의 유산을 받아가지고 먼 곳으로 떠나갔습니다. 아버지의 간섭이 없는 곳에서 자유롭게 살고 싶었습니다. 가진 돈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마음대로 먹고 마시며 인생을 즐겼습니다.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서 가진 돈은 다 없어졌습니다. 마침내 돼지를 치며 돼지가 먹는 열매로 배를 채우고 돼지우리에서 생활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비로소 그는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하며 용기를 내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버지 집에서 일하는 품꾼의 하나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떠나간 아들을 매일 매일 기다렸던 아버지는 먼발치에서 보이는 아들을 달려가 반갑게 맞아들였습니다. 아버지는 그의 손에 반지를 끼워줌으로 그 탕자가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임을 입증해주고 탕자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큰 아들은 아버지를 원망하며 불평합니다. 매일같이 하루 종일 들에 나가 일을 하며 수고를 아끼지 않은 자신을 위해서는 염소 새끼 한 마리 잡아 준 적이 없는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를 위해서 송아지를 잡았다는 사실에 화가 났습니다. 아버지 앞에서 모범생으로 의롭게 살아온 자신의 삶이 억울하게 느껴졌습니다. 아버지의 처사가 불공평하게 생각되어 견딜 수 없이 화가 났습니다. 큰 아들은 집에 들어가기조차 싫어했습니다. 아버지도 동생도 보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이러한 큰 아들에게 아버지는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 죽었던 네 동생이 살아 돌아 온 것이 기쁘지 않느냐?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하다” 고 말합니다. 
  이 비유는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고 떠나갔던 탕자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마음을 몰랐던 큰 아들 역시 죄인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모두 죄인입니다. 사도 바울은 큰 아들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으며 그 뜻대로 산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교만한 죄인이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아주 쉽게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문에 아주 쉽게 누군가를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멸시하며, 자신의 처지를 억울해하고 분통해하며 억지를 부립니다. 
  특히 우리 한국인에게는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이유로 억울하게 종살이를 하며 살아온 오랜 역사가 있습니다. 양반의 가문에서 태어나지 못했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고, 노비로 태어나서 몸값을 치르기 위하여 애써 지은 농산물을 빼앗겨야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타락한 양반들에게 죄 없이 매를 맞아야 했고 가진 것을 빼앗겨야 했습니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 는 호통 소리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라고 울부짖으며 양반이 원하는 것을 모두 바쳐야 했던 상민이나 천민들은 호소할 곳이 없었고 억울하다는 말조차 할 수가 없었습니다. 조선의 법은 양반을 위해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방 안에서 글을 읽는 남편을 대신해서 아이를 등에 업고 들에 나가 일을 하고 집안일을 도맡아 했던 여인들의 처지 역시 노비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여인들은 들에서 일을 하다가 소나기가 쏟아지면 집 마당에 늘어놓은 빨래나 곡식을 거둬들이기 위해서 허둥지둥 달려와야 했습니다. 빨래가 젖고 마당에 늘어놓은 곡식이 다 떠내려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글만 읽고 있는 남편을 향해서 큰 소리 한 번 칠 수 없는 것이 여인들의 신세였습니다.  

  조선 시대에 양반의 가문에서 태어나지 못한 서민들이나 여인들, 서자들, 천민들, 노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들입니다. 이유도 없고 변명의 여지도 없는 죄인들입니다. 저들에게 죄인의 굴레를 벗을 길은 없었습니다. 조상을 원망하거나 자신을 태어나게 만든 하늘을 원망하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그 시대에 양반 가문에 남자로 태어난 사람이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는 양반들의 고집과 패거리 싸움을 멈추게 할 길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저들은 말로 할 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죄인의 나라, 죄인을 위한 나라, 죄인에 의해 운영되는 나라, 죄인이 용서받을 길조차 없는 나라가 망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아직도 우리 한국인에게는 끝없이 자신의 의로움만을 주장하는 양반의 모습과 한이 맺혀서 원망밖에 할 줄 모르는 노예의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 그 때문에 복음에 기초한 자유민주주의 헌법 위에 세워져 있는 대한민국의 국민이지만 ‘죄 사함을 받고 세상의 주인이 된’ 자유인의 여유로움과 책임감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아버지는 탕자도 큰 아들도 모두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압니다. 죄인임을 깨닫는 것과 용서를 받는 것은 동시에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입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죄의 과거는 인간이 청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과거는 용서받아야 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죄의 과거를 용서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이 이웃에게 죄 값을 치르라고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용서받은 사람은 용서해야 합니다. 거저 받았기 때문에 거저 주어야 합니다. 
  용서받은 사람에게 합당한 삶의 길은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9/18/16  한영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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