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사도행전 9:36-43)
초대 교회 시절에 복음을 전하는 일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이 오늘 본문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욥바라고 하는 지역에 살고 있던 다비다(그리스 명으로 도르가)라는 여 제자자가 있었습니다. 다비다를 여 제자라고 소개한 것으로 보아 그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일꾼인 것 같습니다. 다비다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초대 교회의 사도들이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에만 전력할 수 있었던 것도 다비다와 같은 일꾼들이 있어서 성도들을 돌보는 일을 대신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주의 교회를 위해 충성했던 다비다가 병이 들어 죽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슬퍼하며 급히 사도 베드로를 불렀습니다. 베드로가 도착했을 때에 사람들은 다비다의 죽음을 슬퍼하며, 다비다가 얼마나 착한 일을 많이 했으며, 교회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이었는지를 말했습니다. 귀한 일꾼을 잃어버린 저들의 슬픔과 좌절이 이해가 됩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한 후에 시체를 향하여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이에 다비다가 눈을 뜨고 일어나 앉았습니다. 이 일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다고 본문은 보도합니다.
사도 행전에는 사도들을 통해서 일어난 놀라운 기적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치 예수께서 땅 위에 걸어다니시며 기적을 행하시던 때처럼 말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이 함께 했습니다. 제자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기적을 행했고, 이를 통하여 믿는 자가 날로 더해갔습니다. 본문을 읽는 우리의 마음에는 왜 우리에게는 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초대 교회에 그렇게 많았던 기적을 왜 우리는 하나도 일으킬 수 없는지 말입니다. 우리도 이런 기적을 행할 수만 있다면 지금도 수많은 사람을 삽시간에 교회로 인도하는 일이 어렵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전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데,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능력을 주시지 않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돈을 주고라도 성령의 능력을 받으려고 애쓴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큰 돈벌이를 할 수 있을 것 같고, 명성을 얻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성령을 받기는커녕 저주를 받았습니다(행 8:18-24). 성령은 사람이 원해서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뜻대로 주거나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에게는 거저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성령이 선물로 주어져 있고, 성령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일하신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다만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소멸해버리거나, 욕심으로 성령을 거스르고 있을 뿐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베드로에게 주셨던 것과 같은 능력을 주신다면 우리는 그 능력으로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 지를 생각해보십시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증인이 되기만을 원하고,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영광만이 나타나기를 구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사도 행전은 초대 교회의 사도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얻기를 원했던 것은 예수를 전하는 것뿐이었다고 증언합니다. 베드로가 죽은 다비다를 살림으로 얻은 결과는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게 한 것뿐입니다. 성령은 믿지 않는 사람을 믿음으로 인도하고,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게 합니다. 누구든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라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고전 2:3). 성령의 능력은,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를 전하는 예수의 증인이 되게 하는 힘입니다. 예수의 증인이 되는 일이 성령 받음의 목적이요, 성령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많은 교회들이, 특히 우리 한국인들이,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하여 성령의 능력을 이용하려 하지 않습니까? 이는 분명 성령을 거스르는 죄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소위 말하는 기복신앙의 잘못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말(기복신앙은 잘못된 것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의 주인이시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짐을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고, 복을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대신 화가 임한다 해도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순종할 자세가 있어야 참 신앙입니다. 이런 자세가 결여되어 있는 상태, 즉 이기적인 욕심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보다 앞서는 상태를 가리켜 기복신앙이라고 부릅니다. 그런 의미에게 기복신앙은 그 자체가 이미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거부하는 신앙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죽은 다비다를 살려낸 목적은 사람들의 만족이나 행복을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성령이 함께 하시고, 성령의 능력이 우리 안에 임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임하신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려는 마음이 없고, 예수 믿어서 '내' 육신이 잘 되고 '나' 하나 잘 사는 일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우리를 통해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못하고, 우리가 주의 증인으로 살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여러분에게 성령이 임하지 않았다고 생각이 되십니까? 여러분의 삶에 성령이 일으키시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불만이십니까? 병이 낫고, 육신이 죽었다가 살아나야만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병에 걸리지 않고, 죽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 있는 것은 기적이 아닙니까? 인간이 자기 자신의 뜻과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모든 것이 기적이 아닙니까? 오늘 아침에도 우리가 원해서 일어났다고 생각하십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농사를 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밥을 먹고, 길쌈을 하지 않았음에도 옷을 입고, 집을 짓지 않았음에도 집에서 살고, 길을 만들지 않았음에도 길을 이용하고, 발명하지도, 만들지도 않았음에도 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치료를 받고,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를 알고, 우주의 신비를 알고, 예술과 학문의 혜택을 보고, 내가 낳아 기르지도 않은 사람들을 만나고, 사랑하고, 함께 일하고, 하는 일, 등... 이 모두가 기적이 아닙니까? 이 모두가 값없이 주어진 기적이 아닙니까? 더욱이, 이기적인 욕심밖에 지닌 것이 없는 죄인인 우리가 천지 만물 안에 가득 차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을 수 있고,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릴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 있겠습니까? 매일 매 순간 기적을 체험하는 삶으로, 세상 사람들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나타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5/2/10 한영숙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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