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에 동참하자” (누가복음 15: 11-32)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성령의 열매(9개) 중에서 사랑 다음으로 희락(기쁨)을 지적합니다. 기쁨이 하늘나라 삶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는 기쁨, 성령의 열매로서 얻는 기쁨이 어떤 것인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이러한 기쁨을 설명해주는 3개의 비유가 실려 있습니다. 누가는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과, 잃은 은전을 찾은 여인의 기쁨을 기록한 후에, 탕자의 비유로 알려져 있는 본문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버려두고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온 목자의 기쁨이나 잃어버린 은전 하나를 찾았다고 기뻐하며 잔치를 여는 여인의 기쁨을 묘사한 비유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그에 비하여 탕자의 비유는 복잡한 인간의 내면을 묘사함으로 기쁨이란 결코 쉽게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부자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돌아올 몫의 유산을 달라고 하여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난 후에 거지가 되어서 아버지에게로 되돌아옵니다. 돌아 온 아들을 위하여 아버지는 잔치를 베풉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큰 아들은 아버지의 처사에 불만을 품고, 불평을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에는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세 사람은 제각기 다른 자기의 입장이 있습니다. 각자의 입장에서 상황은 해석되고, 받아들여집니다. 기쁨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에 단연 아버지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큰 기쁨을 누리는 사람은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기쁨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자식을 길러본 사람은 다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기쁨은 사랑하는 기쁨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용서하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만약 아버지가 작은 아들이 잃어버린 재산을 기억하거나 그것을 아까워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그의 기쁨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작은 아들도 기쁨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작은 아들에게도 아버지의 기쁨에 못하지 않을 만큼 큰 기쁨이 있습니다. 다시는 아버지를 만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아버지의 아들이 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품꾼의 한 사람으로 대접을 받아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는 그를 아들로 맞아 주었습니다. 작은 아들의 기쁨은 용서받은 자의 기쁨입니다. 쓸모없는 죄인인 자기를 용서하고 받아주시는 아버지의 은혜가 고맙고 감사한 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자신이 죄인이라고 자각하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기쁨입니다. 아버지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는 자각이 있는 한 작은 아들은 용서받은 자의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쉽게 이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인을 용서해주신 아버지의 은혜를 망각합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은혜를 망각하게 될 때에 그의 기쁨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또 다시 자신 속에서 꿈틀거리는 욕심에 사로잡히어 아버지의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싶어 하게 될 것이며, 큰 아들로 태어나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아버지를 원망하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와 작은 아들이 이렇게 기뻐하는 동안에 전혀 그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큰 아들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날려버린 동생이 돌아온 것을 기뻐할 수 없었고, 그런 패륜아를 아들로 다시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처사를 기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처사는 불공평하기 짝이 없습니다. 언제나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며 충실하게 일해 온 자기에게는 엄격하기만 한 아버지가 탕자인 동생을 위해서는 살찐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베푼다는 사실이 부당하게만 여겨졌습니다. 이러한 맏아들에게 기쁨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의 마음은 분노와 원망과 증오로 들끓습니다. 맏아들은 공평과 정의를 주장합니다. 맏아들이 표면적으로 원하는 것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이고, 그에 합당한 상벌을 내려달라는 것이지만, 사실상 맏아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질투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빼앗아 간 동생에 대한 질투입니다. 자기보다 더 사랑을 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견딜 수 없고, 자기의 공로가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 같아서 괴롭고, 잔치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외곽으로 밀려나 있는 느낌 때문에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 모두의 출발점은 질투입니다. 질투로 가득 찬 인간의 마음에 결코 기쁨이 깃들 수는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여겼던 바리새인들을 이와 같은 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아버지에게 있던 용서하는 사랑의 기쁨이 있습니까? 아니면 작은 아들처럼 용서 받은 자의 기쁨으로 충만합니까? 혹 맏아들처럼 기쁨보다는 분노와 원망과 증오로 괴로워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교회는 기쁨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 생활을 통하여 이러한 기쁨에 동참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압니다. 유난히 질투가 많아서,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고, 남에게 지고는 살 수 없는 우리 한국인들의 교회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은혜의 공동체인 교회에는 작은 아들과 같이, 마땅히 받아야 할 대접보다 더 큰 대접을 받는 사람들이 항상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새로 오는 가족들입니다. 새로운 가족은 기쁨의 존재들입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하여,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버려두고, 들로 산으로 헤매는 목자의 마음으로 기뻐하는 기쁨이 새 가족을 맞이하는 교회의 기쁨입니다. 교회에는 언제나 용서 받은 죄인들의 기쁨이 있고, 백 명의 의인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을 더 기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와 함께 이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는 맏아들의 질투로 인한 괴로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뻐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기쁨에 동참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9/26/10 한영숙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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