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함께하는 삶” 마태복음 2:13-18
예수와 함께하는 요셉의 삶은 고달프기 짝이 없습니다. 예수의 탄생 때부터 남들이 감당할 수 없는 고민을 겪어야 했고, 남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결단을 해야만 했습니다. 사람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기위하여, 자기 욕심이나,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 수가 없었습니다. 유난히 고달픈 요셉의 삶은 예수의 출생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고난은 계속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일어나 아기를 데리고 애급으로 피난가라”고 하셨습니다. 헤롯왕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고달픈 삶은 평생 계속 되었습니다. 잠시도 잊어버릴 수 없는 자기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는 모습까지 보아야만 했던 아버지의 괴로움은 자기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는 것보다 더 한 괴로움이었을 것입니다.
예수의 생애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예수와 함께 하는 사람의 삶 역시 고달플 수밖에 없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고 하신 예수의 말씀처럼 예수의 생애는 고달팠습니다. 주의 삶이 그러할 때에 그 주를 섬기는 종들의 삶이야 더 말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께서 가신 길이 십자가의 길인데, 예수를 따르는 사람의 길이 십자가의 길일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를 향한 길은 결코 화려한 꽃밭이 아닙니다. 고독하고 힘든 고난의 길입니다. 예수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의 고난은 더욱 크게 마련입니다. 지난 화요일에 있었던 교인총회에서 선출된 임원들을 오늘 발표했습니다. 이 분들은 특별히 예수의 몸인 교회를 섬기는 일에 선택을 받은 분들입니다. 교회의 직분이나 직책은 권력을 행사하거나 명예를 얻는 자리가 아닙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한 것이나,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한 후에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희생하는 자리입니다. 교회의 일을 하는 것은 남들이 하지 않는 고생을 덤으로 하는 것이며, 예수의 십자가를 뒤따라가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자청해서 살려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들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요셉이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아버지가 된 것은 요셉이 선택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요셉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하나님은 자기의 사람들을 선택하십니다. 때와 장소를 따라, 필요한 사람을 선택하셔서, 자기의 뜻하신 바를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덩이를 가지고도 위대한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귀하게도 하시고, 천하게도 하시며,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와 함께하는 고난의 길을 가라고 여러분과 나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예수의 사람들만 고달픈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 없이 사는 사람들은 편하고 행복하게만 삽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고, 자기 욕심대로 살아가는 세상사람들 역시 고달픈 인생을 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베들레헴의 어린 아이들처럼 영문도 모르는 채로 죽임을 당하고, 이유도 모른 채 자식이 죽는 것을 보아야만 하는 고통 속에서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호랑이를 피하면 곰을 만나게 된다는 유대인의 속담처럼, 산 넘어 산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 인생살이입니다. 모든 인간은 제각기 힘든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올해가 유난히 힘든 해라고 아우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금년의 생활이 과거 가난했던 시절과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땅위에 사는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고달프게 삽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는 우리 속담은, 인생이란 어차피 고생스러운 것이니, 젊어서 고생을 함으로, 고생스러운 인생에 대처할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일찍이 길러놓는 것이, 한평생 살아가는 인생살이에 도움이 된다는 말입니다. 운이 좋아 부모를 잘 만나도, 언제까지나 그 부모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며, 부모가 대신 살아 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반드시 자기 자신이 홀로서서 자신의 삶의 무게를 감당해야할 날이 오고야 맙니다.
십자가로 대변되는, 예수를 따르는 삶만이 고달픈 것이 아니라, 예수 없이 사는 삶 역시 고달프기는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다만 예수를 따르는 삶과 예수 없이 살아가는 삶에는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예수 없이 사는 사람은, 그의 삶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고, 예수와 함께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의 삶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는 삶, 모든 것을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평안이 있고 안식이 있겠습니까? 인간이 책임질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러한 삶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자유와 존엄을 자랑할 것입니까? 참으로 그 삶에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까? 그 삶에 진정한 존엄과 영광이 있겠습니까? 자기가 하는 모든 일에 책임을 지려하면 할수록 후회와 회환으로 몸부림칠 수밖에 없고, 자기 자신에게 절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는 늘 불안하고, 걱정 근심에서 헤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이 일어날까봐 걱정이요, 불가항력의 일에 대처할 길이 없기에 불안합니다. 헤롯이 베들레헴의 아이들을 모두 죽이리라는 사실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불상사가 일어난 것이 아닙니까? 무슨 힘으로 이런 재난을 막는단 말입니까? 누구에게 항거하고, 누구를 대상으로 싸운단 말입니까? 싸우고 말고 할 시간도, 여유도 없습니다. 저들은 자기의 사랑하는 자식, 목숨보다 더 귀한 품안에 있는 어린 자식을 눈앞에서 빼앗기고,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와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의 적나라한 삶의 현실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산다는 큰소리는 허구요,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무의미한 ‘개죽음’을 했다고 통곡할 수밖에 없고, 억울한 한을 풀길이 없다고 아우성을 치는 것이 예수 없이 사는 사람의 삶입니다.
예수와 함께하는 사람의 삶 역시 고달프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더 고달플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를 향한 길이 편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길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길입니다. 예수와 함께 하는 사람의 삶은 자기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의 삶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베들레헴에서도, 유대 땅에서도, 애급 땅에서도, 하나님은 그와 함께하십니다. 요셉을 부르신 하나님은 그를 잊지 않으시고, 위험을 피하게 하시고, 나사렛으로 가서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는 평안이 있고, 의미가 있고, 감사가 있습니다. 그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위한 것이기에 영광이 있고, 하나님이 주실 상급인 하늘나라의 면류관이 그를 위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기에 실패란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실패가 아닙니다. 그 것은 의미를 지닌 것이고, 역사성을 지닌 것이고,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하는 삶은 나사렛에서 가난하게 살아도, 애급의 피난민으로, 노예로 살아도, 헤롯의 뜰에 있어도, 빌라도의 법정에 있어도,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위에 있어도, 그 삶은 굴욕과 치욕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기에, 역사적 의미를 지닌 것입니다. 세상의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하나님이 그에게 부여한 삶을 사는 것이기에, 영광이고, 존귀한 삶입니다. 예수와 함께 하는 삶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평안이 있고, 감사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 예수와 함께하는 고난의 삶으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 여러분을 부르신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는 여러분 모두의 삶이되기를 기도합니다. 12/26/10 한영숙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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