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게 주신 능력” 요한복음 20: 19-23
요한복음서는 오늘 본문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나타나신 첫 번째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일 날 저녁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들을 닫아걸고 모여 있는데 예수께서 오셔서 가운데 서시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며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신 줄을 알고 기뻐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기뻐하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서에 의하면 성령강림절과 부활절은 같은 날인 셈입니다. 성령을 받지 않고는 누구도 예수를 부활하신 주로 믿을 수 없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은 교회에게 주어진 특별한 능력(권한, 권위)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죄인을 향해서 “죄 없다”고 선언할 수 있는 능력이 교회에게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죄를 용서하는 능력은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인간이 죄 사함을 받으려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능력을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 즉 그의 교회에게 주셨습니다. 교회가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는 것은 요한복음서 만이 아니라 공관복음서도 전하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서는 예수를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천국 열쇄를 맡기시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곧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베드로에게(교회에게)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이 능력은 오늘 날에 이르러서 가톨릭 신부들이 고해성사를 받는 데서 그 모양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중세기의 교회는 죄인을 잡아서 가두고, 벌주고, 화형에 처할 수도 있었고, 한 나라의 임금을 세우고 폐하는 능력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면죄부라는 것을 만들어 많은 돈을 받고 팔기도 했습니다. 면죄부는 살아 있는 사람의 죄만 용서해주는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의 죄도 용서하고, 그 영혼을 천국으로 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이처럼 중세기 교회의 능력은 막강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세기 사람들과 달리, 현대인들은 더 이상 교회가 이런 능력을 가졌다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현대인들은 인간이 용서를 필요로 하는 죄인이라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현대인들이 이렇게 생각하게 된 근거는 현대인들의 삶을 주장하고 있는 현대 헌법 때문입니다. 현대 헌법 아래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죄인 취급을 당할 필요가 없습니다. 현대헌법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중세기의 인간사회를 지배하던 법은 종교였습니다. 중세기적인 사회 모습을 가진 나라들이 지금도 지구촌에 많이 있습니다. 특히 이슬람 국가들이 그러합니다. 이슬람 국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중세사회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사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최근까지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법은 유교입니다. 유교의 영향은 아직도 한국사회에 깊이 뿌리박혀 있습니다. 법적으로는 죄인이 아니지만 한국 사회의 전통 문화가 사람을 죄인이라고 몰아붙이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이 힘들고 숨이 막힐 지경이라는 말을 합니다. 한국 유교의 중심 사상은 효입니다. 인간의 옳고 그름의 표준이 효라는 말입니다. 효를 행하는 것이 의이고 불효를 행하는 것이 죄입니다. 아직도 효 사상은 한국인의 의식 깊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인은 사람이 잘 되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고, 잘못되는 것은 가문의 수치라는 말을 합니다. 효라는 관점에서 보면, 사람이 결혼을 하지 않거나, 아들을 낳지 못하거나, 가정에 문제가 생기거나, 여자로 태어나거나, 불구자로 태어나는 것, 혹은 불구자가 되거나 실패자가 되는 것, 등은 말할 수 없이 큰 죄입니다. 효의 기본인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죄 값을 치르는 것은 당연하고, 죄인이 사회 전체의 지탄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지 문제가 있거나 결격사유가 있는 사람들이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은 아직도 참으로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난 월요일 새벽에 우연히 TV 프로그램(스타킹)에서 최혜연이라는 피아니스트와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이희아(키도 작은 기형아)가 함께 피아노를 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최혜연은 3세 때에 사고로 오른쪽 팔목을 잃었습니다. 그녀가 왼손가락 다섯 개와 오른쪽 팔뚝으로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지켜보는 그의 어머니는 계속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최혜연은 자기가 피아노를 치게 된 것은 이희아가 피아노를 치는 것을 보면서 용기를 얻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을 보면서 나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저들이 불구자의 모습으로 당당하게 메스컴에 출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교회(인간)에게 주신 죄 사함의 능력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유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 불구자로 태어난 이희아는 만고의 불효자이고 돌이킬 수 없는 죄인입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아 마땅하고, 얼굴을 들고 사람들 앞에 나타날 수 없는 죄인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를 보면서, 그가 불구자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2천년 동안 교회는 이 말씀을 선포해왔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교회에게 주신 능력입니다. 죄인을 “죄 없다”고 인정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게 주셨습니다.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교회의 능력이 죄의 노예로 쇠사슬에 묶여 고통 속에 신음하며 살아가던 인간을 해방시켜 자유롭게 합니다. 이 능력이 현대헌법을 낳았고, 현대헌법 아래에서 인류는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능력,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행사하기는커녕, 오히려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거나, 위선자가 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를 받았고, 하나님이 주신 죄 사함의 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선택을 받았습니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행사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5/15/11 한영숙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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