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폴리탄 한인 연합감리교회 설교 모음



Metropolitan Koryo United Methodist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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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t : 787 date : 2013-05-27 11:48:56
NAME :    한영숙
SUBJECT :    평화를 누리자
HOME :    없음

“평화를 누리자”  로마서 5: 1-11  

  요즘 우리는 “한반도 평화” 라는 말을 도처에서 듣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과 북한은 서로 만나서 육이오 종전 선언을 하고 한반도 평화선언을 하라” 고 떠들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많은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이 화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것을 봅니다. 기독교인들이 사용하기 시작한 이 단어를 이제는 한국의 정치가들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정치가들은 아주 쉽게 자기가 “남북화해를 이루거나 동서화해”를 이룰 수 있다는 식의 약속을 합니다. 
  그러나 과연 “화해”, “화목”, “화평” 즉, “평화”라는 말이 그렇게 쉬운 말이고 “화해를 성취 하겠다”는 약속을 쉽게 할 수 있는 것인지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과 공산독재 국가인 북한이 쉽게 “화해”할 수 있는 것인지, 권력 장악이라는 정치적인 목적을 두고 이해관계에 얽혀 싸워야하는 사람들이 서로 “화목” 할 수 있는 것인지, 물질적인 소유를 쟁취하기 위해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화평”이나 “평화”가 있을 수 있는지 질문해야 합니다. 
  쉽게 이루어질 수 없고, 심지어 인간의 힘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을 쉽게 이룩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말에 속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아주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특히 나라를 지켜야 하고, 사업체를 지켜야 하고, 공동체를 지켜야 하고, 가정을 지켜야 하고, 자기 자신을 지켜야만 하는 사람들이 거짓말에 속는다면 말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화평이나 평화, 화해는 오늘의 본문과 같은 성경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이런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한 사람은 바울 사도입니다. 바울은 “화해하였다”는 말과 함께 “화해라라” 혹은 “화목하게 하라” “화평을 누리라” 등의 표현을 곳곳에서 사용합니다. 
  바울 사도가 “화해, 화목, 평화” 라는 말을 그의 서신 곳곳에서 사용하고 있으니 이 말이 아주 쉬운 말이거나, 이 말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쉽게 형성될 수 있는 상태인 줄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교회 안에서 설교자가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남편과 아내’, ‘시어머니와 며느리’, ‘부모와 자식’, 등 가족이나 목사와 교인, 교인과 교인 사이에 서로 화해하고 화목하고 화평하라고 권하던 말이 교회 밖으로 나가서 세상을 향해 하는 말이 된 것 같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화해”라는 말은 세상을 향해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화목하게 하는 직분”이라는 말은 세상의 권력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화평을 누리자” “평화를 이룩하자”라는 말은 정치나 경제의 이해관계에 얽힌 사람들 사이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가족이나 교회는 사랑을 전제로 형성 되어 있는 공동체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용서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화해가 가능하고, 용서 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평화가 가능합니다. 사랑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용서니 화해니’ 하는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 5장 1절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라고 선언했을 때 이 말을 듣는 사람은 이 말이 가지고 있는 무게를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평화를 누리는 사람”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사람은 하나님과 화해를 하였고,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이루었다는 의미입니다.  
  인간관계의 출발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예로서 아담의 범죄 후에 아담과 이브의 관계가 서로를 부끄러워하는 관계로 변합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평화롭지 못한 사람이 사람관계에서 평화를 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어긋나 있는 사람은 욕심에 사로잡혀 있는 죄의 노예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 평화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는 욕심에 사로잡혀서 치열하게 투쟁하는 전장에서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욕심에 사로잡힌 죄인이 누리는 평화란 거짓 평화일 뿐입니다. 잠시 만족하는 자신의 욕심에 속고 있을 뿐입니다. 오래지 않아 생겨날 또 다른 욕심에 의해 그 평화는 깨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나에게는 모자란 것이 없고, 부족한 것이 없다” “나는 모든 것을 가졌다” “나는 만족 한다” “나는 범사에 감사 한다” 고 스스로 고백할 수 있게 될 때에 진정한 평화가 그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된 과정을 본문 앞에서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죄인이 어떤 것이지, 그 죄인이 받는 형벌의 삶이 어떠한 모양인지를 설명한 후에 이러한 죄인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추하고 악한 모습으로 죽음에 처해 있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가 희생의 제물이 되어 죄인들이 치러야 할 죄 값을 대신 치르도록 하시고 죄인들에게 구원 얻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그가 어떤 흉악한 죄인이든지, 이 사실을 믿으면, 즉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의 사건을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됩니다. 
  이처럼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되기까지에는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이 전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외아들을 죽음에 내어주기까지 죄인인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셨다는 말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심정을 안다면 이 말이 가진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가부장 사회에서 아버지의 대를 이어갈 아들이 하나 밖에 없는데, 그 아들을 희생시킨다는 말이 어떤 것인지 말입니다. 
  외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참담한 심정, 암담한 절망, 쓰라린 고통, 그 무엇으로도 위로를 받을 수 없는 좌절과 천지에 버려진 것 같은 고독, 등을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셨다는 말이 “예수 그리스도” 라는 말에는 담겨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희생을 통하여 죄인인 우리와 “화해”할 길을 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용서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독생자를 우리 대신 희생시키고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이 말을 믿는, 받아들이는,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가리켜 “은혜”라 하고, 이 은혜를 전하는 말을 가리켜 “복음” 이라고 합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평화”는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들, 예수를 믿는 사람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만이 얻을 수 있습니다. 이 평화는 세상이 말하는 거짓 평화가 아닙니다.    
  이 평화는 그 어떤 환란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참 평화입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상황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마치 세상에서 이미 죽고 없는 것 같은 사람이 누리는 하늘의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평화입니다.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는 참된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여 이 평화의 증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5/26/13  한영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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