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살리라” 에스겔 37:1-10
바벨론 포로시기를 전후하여 활동했던 에스겔 선지자는 마른 뼈 같은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과 이들을 살려내시겠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언자이며 시인이었던 에스겔은 남의 나라에 포로가 될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미 죽어서 썩은 마른 뼈와 같은 모습으로 보았습니다. 살려고 발버둥치지만 나라의 독립을 지킬 힘이 없는 이스라엘은 죽은 지 오래된 마른 뼈들과 같았습니다. 육신이 숨을 쉰다고 해서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한 국가가 국가로서의 자주성을 지키지 못하고 다른 나라의 식민지가 되어 온 국민이 다른 나라의 종살이를 하게 될 때에 그 민족은 죽은 것입니다. 국가만이 아니라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을 죽음의 공포와 불안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대표적인 것은 전쟁이나 테러, 천재지변이나 질병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전쟁이나 테러와 같은 물리적인 공격이나 천재지변이나 질병과 같이 생명을 위협하는 외부적인 현상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요인들은 많이 있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경우에도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말을 듣지만 참으로 살아 있는 것 같지 않고 이미 죽은 것과 같기 때문에 삶에 대한 의욕을 상실합니다. 고독이나 소외감, 상실감과 죄책감 같은 것들이 인간을 이렇게 만듭니다.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나라 미국에서도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인정받지 못해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동성애자들의 경우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을 죄인이라고 단정하고 그들의 고민이나 고통을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의 친구가 되려하지 않기 때문에 소외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저들에게 냉혹하다고 해도 정작 그들을 가장 괴롭게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들일 것입니다.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대해주느냐 하는 것 보다 스스로 자기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남들처럼 결혼을 할 수 없고 아이를 가질 수 없고 사회적으로 떳떳할 수 없는 것이 괴롭고, 그러한 삶이 죄 값으로, 혹은 저주와 형벌로 여겨지기에 고통스럽고, 그러면서도 그 상태에서 헤어날 수 없기에, 저들의 삶은 정녕 죽은 것과 같습니다. 죽은 것 같은 상태로 사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수없이 많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인생을 살지 못하고, 원하지 않는 상태에 얽매여 벗어나지 못하고, 죽지 못해 사는 경우 말입니다. 마약 중독이나 알코올 중독, 혹은 범죄 조직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그러하고, 어떤 이유 때문에 범법자가 되어서 쫓기는 경우도 그러합니다. 심지어 남들이 보기에는 부족할 것이 없어 보여서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결혼의 경우도 당사자에게는 그 결혼이 죽음의 상태일 수가 있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명성을 누리는 자신의 삶을 감옥에 갇힌 사형수처럼 여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때문에 에스겔 선지자가 본 환상은 몇 천 년 전 이스라엘 민족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21세기에 살고 있는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저 마른 뼈들을 되살리신 하나님의 영이 오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꿈과 희망의 예언으로 남아 있습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뼈들을 살려내시는 하나님의 영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인간은 빵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을 때에 이스라엘은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인류는 죽음에 처해 있습니다. 살인자도, 범법자도, 마약중독자도, 사형수도, 그 어떤 이유 때문에 죽어 있는 것 같은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살아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말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권위를 가지고 전해지는 말이 많이 있습니다. 구약의 모든 말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겨졌고, 불교의 경전이나 힌두교, 유교, 이슬람교 등, 모든 종교는 절대의 권위를 가진 말씀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주의 주장을 절대화한 말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 모든 말 중에서 가장 귀한 말, 영원히 살아 있는 말,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율법을 지키면 산다는 말입니까? 깨달으면 산다는 말입니까? 선을 행하면 산다는 말입니까? 정의를 행하면 산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법을 지키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선을 행하지 못하고 정의를 실행할 수 없기 때문에, 또 그럴 힘이 없어서 이미 죽은 것과 같은 상태에 처한 사람에게 그 말이 무슨 소용이 있고 어떤 힘이 있겠습니까?
여기 하나의 말이 있습니다. 죽어 있는 사람도 살릴 수 있는 하나의 말이 인류에게 주어졌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아무런 요구나 조건이 없이 있는 그대로의 너를 사랑하셔서 너를 위하여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셔서 너를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 하여금 네 대신 죄 값을 치르게 하셨으니 이제 너는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이 복음입니다. 이 말을 믿는 것이 곧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이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절대적인 말, 가장 귀한 말로 여기고, 고맙게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이 말이 세상에 자신을 드러낸 날이 성령강림절입니다. 이 말이 강력한 힘을 가진 말로 세상에 울려 퍼지도록 한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 복음이 온 세계의 언어로 전파되기 시작한 날이 성령강림절입니다. 이 말이 앉은뱅이를 살리고, 소경을 보게 하고, 병든 자를 낫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살아있는 말이 되도록 만드는 힘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성령강림절의 말 사건으로서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라” 고 한 요엘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내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여 나를 위하여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모두에게,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으며 범사에 만족(기뻐)할 수 있습니다. 감사로 충만한 것이 생명의 표시입니다.
5/24/15 한영숙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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