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드러내는 말씀” 히브리서 4:12-16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죄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고 본문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예수를 가리킵니다. ‘많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고 한 히브리서 1장 1절과 2절의 말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곧 예수 자신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인간 예수,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 앞에서 모든 인간은 죄인인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어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의 가르침 때문만이 아니라 예수의 삶과 십자가의 죽음 때문입니다. 그의 가르침은 시대에 뒤진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가르침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과 죽음 앞에서 모든 인간은 변명의 여지가 없이 추하고 더러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밖에 없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는 아주 작은 육신의 상처에도 비명을 지르며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채찍에 맞아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었고 머리에 가시로 만든 관을 쓰고 허리를 창에 찔리고 양쪽 손과 발에 못이 박힌 채 십자가에 달려서 피와 땀을 흘리며 죽었습니다. 육신에 가해지는 그 어떤 고통도 예수께서 당하신 고통과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주 작은 육신의 고통도 견디지 못하여 하나님을 원망하고 이웃을 원망하기 일쑤가 아닙니까? 이런 우리가 어찌 예수 앞에서 죄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당하는 고통 중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 중의 하나가 배신당하는 고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고 기대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할 때 살인까지 생각하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배신자를 용서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기를 배신했던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자기를 판 제자와 자기를 모른다고 부정하며 도망쳤던 제자들, 한 때는 호산나를 부르며 찬양했던 사람들이 자기를 찌르고 때리고 침 뱉고 욕하는 것을 용서하셨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남편이나 아내, 자식, 친척, 친구, 교우, 이웃 중에서 나와 가까이 지내온 어떤 사람이 무심코 던진, 혹은 실수로 던진 한 마디 말에도 화가 나서 견딜 수 없고 실수조차 결코 용서하지 못하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죽기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그만큼 순종이 어렵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순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방 안을 뛰어 다니는 아이가 ‘뛰어 다니지 말라’는 어른의 말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뛰어다니는 즐거움을 포기해야 합니다. 부자 청년에게 “네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청년은 자기가 가진 소유물을 포기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지라고 하는 부모의 말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포기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가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외아들 이삭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포기하지 않고는 결코 순종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주 작은 것까지도 결코 포기할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포기하려 하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예수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의 삶 앞에서도 우리 인간은 모두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세리와 창기의 친구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매국노라고 손가락질 받던 세리를 멀리하지 않으시고 제자로 삼으셨으며 이름난 창녀였던 막달라 마리아를 제자로 받아들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귀신들린 사람들, 문둥병자들, 불구자들,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예수를 따라 다녔습니다. 예수 주변에는 여러분과 나 같은 보통 사람들이 상대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로 들끓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합니까? 오늘의 교회는, 오늘날 예수의 제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어떠합니까? 우리 교회에 가끔 홈 리스가 찾아옵니다. 홈 리스들은 대부분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고 냄새나고 지저분합니다. 홈 리스로 3일만 살면 그렇게 됩니다. 교인들은, 심지어 아이들까지도 그를 동정하지 않고 피하고 쫓아내려 합니다. 학교에서도 자기와 비슷하지 않은 아이를 왕 따 시키고 몰매를 때리는 아이들이 많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실에 직면할 때 누구든지 예수를 떠올린다면 자신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 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예수라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더럽고 추한 죄인의 모습이 온전하게 드러납니다. 예수 앞에서 우리는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속마음 저 은밀한 곳까지 들여다보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앞에서 우리는 도망갈 곳이 없고 숨을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앞에서 인간은 모두 죄인이 됩니다.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두려워 떨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구원해 줄 대제사장이 있다고 본문은 외칩니다. 그 분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를 통하여 인간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고, 부활하여 승천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만남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는 인간의 지혜나 상상력을 뛰어넘는 참으로 신비롭고 오묘한 진리입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를 만남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순간에 우리는 부활하고 승천하신 예수를 만나고 용서함을 받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은 동시에 일어납니다. 예수의 십자가가 나를 위한 십자가임을 알게 되고, 예수의 십자가와 함께 나 자신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나의 세계, 내가 속해 있는 죄의 세계가 침몰하고, 부활하신 예수와 함께 새롭게 전개되는 하나님의 세계에서 다시 태어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지금까지의 내가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새로운 내가 다시 태어나는 체험은 동시적으로 일어납니다. 이 체험을 가리켜 중생의 체험이라고 합니다. 다시 태어나는 경험이란 말입니다.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않고는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영생을 얻기 원하는 사람은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자신이 죄인인 줄 모르는 사람은 죄 사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의사는 환자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신 것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예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새 생명을 얻는 기적이 여러분 모두에게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10/25/15 한영숙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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