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재외동포 문학상 체험수기 부문(대상)
흘러간 세월의 강 언덕에 앉아
진경자(독일)
흐르는 것이 어찌 강물뿐이랴, 거친 풍랑 속에 내 인생의 강도 흘러서 이제 하구 가까이에 와 있다.
처음 낯선 독일 땅에 와서 해가 설핏해진 저녁 무렵이면 두고 온 어린 두 자식과 가족들이 못 견디게 보고 싶을 때마다 이 강변에 나와 서성거렸고, 언어가 안 통해서 가슴이 답답할 때도 이 강가에 나와 앉아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하소연을 했다. 무쇠같이 단단하던 사람이 불치병에 걸려 불과 몇 달 만에 늦가을 가랑잎 부서지듯 처절하게 망가져 갈 때도 병원에서 나와 이 강변에 앉아 통곡하며 하느님을 수없이 부르기도 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더 잘살아 보겠다고 이국 만리 여기까지 왔는데 끝내는 타국 땅에 남편을 묻고 이제는 더 이상 울 기력조차 없어 넋을 놓고 하염없이 흐르는 강물만 바라보던 때도 많았다.
나는 황혼으로 곱게 물든 마인(Main, 프랑크푸르트 도심을 흐르고 있는 강) 강가에 나와 앉아 소리 없이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흘러간 삼십 년을 반추해 본다.
낯선 땅 독일을 향하여
황금빛 개나리꽃이 지천으로 곱게 피어 있던 삼십 년 전 4월, 나는 20킬로그램의 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4백여 명의 승객이 탈 수 있다는 에어프랑스를 타고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에 내렸다. 김포공항에서 가족들과의 이별은 참으로 힘들었다. 누구보다도 내 손을 잡고 놓지 못하시는 어머니 아버지의 메마른 손을 어찌 뿌리치고 발길을 돌렸는지 모르겠다. 그보다 더 못할 일은 어린 자식을 품에서 떼어놓는 일이었다. 어미로서 이보다 더 잔인한 일이 있을까! 아버지는 당신이 무능해서 너를 타국에까지 돈 벌러 보낸다며 흐느끼셨다. 비행기에 오른 지 열대여섯 시간이 지나 지구의 반 바퀴를 돌아서 낮과 밤이 정반대인 낯선 세상에 왔건만 엄마가 어디 갔는지도 모르고 있을 두고 온 내 어린 두 자식과 고생에 찌든 가족들의 모습이 천근의 무게로 내 가슴을 짓누르고 있어 나는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가 없었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내린 우리 일행은 파란 눈에 한 사십쯤 되어 보이는 금발 여인과 함께 통역으로 나온 한국 여인의 안내를 받으며 공항에 마중 나온 병원 버스에 실려 대학병원 구내에 들어왔다. 버스는 병원 건물을 몇 채 돌더니 한쪽에 자리 잡은 고층 건물의 기숙사 앞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곧이어 방 배치가 있었는데 엘리베이터 앞에 위치한 7층 8호실이 내가 거처할 방이었다. 몇 마디 설명을 끝내고 안내자가 나가자 혼자 된 나는 새로 수리한 것 같은 새하얀 벽을 보니 으스스 한기가 들었다. 방 안에 들어 있는 가구는 벽을 따라 길게 붙어 있는 일인용 나무침대와 문 두 쪽짜리 옷장, 크지 않은 책상과 손바닥만한 거울이 붙어 있는 세면대가 전부였다. 몇 평 안 되는 방에 덩그러니 앉아 있으니 마치 절해고도에 혼자 떨어진 것만 같았다. 한 동안 넋을 놓고 앉아 있던 나는 세면도구만 꺼내 놓고 가방을 풀 생각도 않고 방구석에 밀어놓은 채 사흘이 지나갔다. 서발작대기를 휘둘러도 거칠 것 없는 사고무친이 된 내 신세가 서러워서 빈 방에 앉아 눈물만 흘렸다.
나의 첫 근무처
내가 일하게 된 병동은 침대가 31개나 되는 제법 큰 부인과 병동이었다. 처음 몇 주 동안은 오전에는 독일어 수업이 있었고 오후에는 병동 근무를 하게 했다. 직원들은 독일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유고슬라비아나 이탈리아, 스페인으로부터 아프리카 사람에 이르기까지 여러 나라 사람들이 섞여 일하고 있었다. 여자 직원 중에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유고 여자들은 거의 청소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자기 이름도 못 쓰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직원들은 대체로 친절했다. 말도 제대로 못 알아듣고 일도 서툰 나를 친절히 데리고 다니며 일일이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갑자기 바뀐 환경과 노릿하고 이상한 냄새가 나는 사람들, 식성에 안 맞는 낯선 음식에 속이 메슥거려 아무것도 입에 댈 수가 없었다. 말은 왜 그리도 빠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이 바람처럼 귓가를 휙 스쳐갔다. 근무 나가면 독일어가 나를 번번이 당황케 만들었다. 나는 독일어가 왜 이렇게 시끄럽고 빠른가 했는데, 못 알아듣는 외국어는 다 빠르고 시끄럽게 들린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아침 근무를 나갔는데 같이 일하게 된 수간호사가 목욕실에 가서 무엇을 가져오라고 했다.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 다시 물어봤으나 내 귀에는 목욕실이라는 단어만 들어 올 뿐 여전히 캄캄절벽이었다. 또다시 물어볼 용기가 안 나서 나는 무조건 목욕실로 갔다. 지금 상황에 무엇이 필요할까 하고 사방을 휘휘 둘러보니 플라스틱 대야가 눈에 들어왔다.
아, 그렇지. 어제 수술한 환자이니 침대에서 씻기려고 하는구나.?어림잡아 가지고 간 대야는 적중해서 잘 넘어가 바보는 면해서 다행이었지만 내 신세가 마치 주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살피느라고 주인 입만 쳐다보는 개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어 서글펐다. 그렇게 갖가지 스트레스를 받으며 여덟 시간을 꼬박 서서 일해야 하는 중노동에 시달리다가 저녁에 기숙사 방에 들어오면 다리는 퉁퉁 부어 물먹은 솜같이 무겁고 온몸은 삶아 놓은 배추 꼴이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도 없었다. 유럽인들은 어려서부터 버터를 먹고 자라서 그런지 체격도 우리네보다 크고 기운도 좋았다. 그들은 근무 시간에도 앉지 않고 황소같이 일했다. 그러니 아무리 피곤해도 일도 제대로 못 하는 주제에 남들 일하는 데 눈치가 보여서 앉아 있을 수도 없고 다리가 아파서 견딜 수 없게 되면 슬그머니 화장실로 가서 한참씩 앉아 있다가 올 때가 많았다. 화장실에 들어가면 근무 나올 때 가지고 나온 한국에서 보내준 가족들 편지까지 읽고 나왔다. 어느 날은 애들 사진을 가운 주머니에 넣고 나와서 꺼내 보기도 했다. 화장실에 자주 드나드는 나를 보고 직원들은 내가 속이 나쁘거나 방광이 안 좋은 줄 알고 의사한테 한번 가보라며 걱정을 해주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더니 그렇게 힘들었던 근무도 한 달 가고 두 달 가니 차츰 귀도 트이고 일도 손에 익어 갔다. 일과 언어에 다소 자신이 생기자 나는 짧은 독일어지만 6개월도 안 되어 다른 병원에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처음 찾아간 곳은 가톨릭 재단 병원이었는데 수녀 간호원장은 검은 제복 때문인지 인상이 엄해 보였지만 나에게 의자까지 권하며 아주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나는 움푹 들어간 유리알같이 파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내가 독일 말은 서툴러도 일은 아주 잘 합니다? 하면서 찾아온 용건을 말했다. 그녀는 내가 믿음직스럽게 보였는지, 아니면 간호사가 마침 필요했는지 바로 일할 수 있게 해주었다. 내가 일할 병동은 여자 내과인데 환자의 대부분이 할머니였다. 그리하여 쉬는 주말이나 휴가를 받으면 그곳에서 열심히 일해서 내 봉급과 보태 한국으로 송금을 할 수 있었다. 그때 독일 마르크 환율이 높아 당시로서는 한국에서 받던 내 봉급의 몇 배인 큰돈이었다. 용돈도 안 남겨 놓고 다 부쳤다. 학비도 제때에 못 내는 동생들이나 자식들 얼굴을 생각하면 힘든 줄도 모르고 일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돈 때문에 주말이나 휴가 때도 쉬지 못하고 다른 병원에까지 일을 가지만 재미있는 일도 더러 있었다. 휴가를 받아 밤 근무를 나간 첫날, 자정도 훨씬 넘긴 시간에 깊은 물속같이 조용하던 병동이 갑자기 왁자하니 소란해졌다. 무슨 일인가 하고 소리 나는 쪽으로 급히 달려가 보니 할머니 두 분이 침대 하나를 놓고 서로 자기 침대라며 우기며 싸우고 있었다. 사연인즉, 할머니 한 분이 자다가 일어나서 화장실을 다녀왔는데 와 보니 자기 침대에 다른 할머니가 누워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서로 자기 침대라고 우기는데 내가 늘 일하는 병동도 아니고 더구나 근무 첫날이니 나 역시 어느 환자가 진짜 침대 임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방은 환자가 셋이 있는 병실이어서 나는 다른 할머니들을 깨워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임자가 확인되자 나중에 들어온 할머니에게 침대를 빼앗긴 할머니를 데리고 복도로 나왔으나 어느 방에서 나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할머니한테 물어봐도 3호실이라고 했다가 8호실이라고 했다가 오락가락했다. 작은 손전등을 들고 방마다 일일이 점검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네 번째 병실에 가서야 빈 침대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할머니를 데리고 들어가서 옆 환자를 깨워 이 할머니 자리가 맞느냐고 물어봤더니 그렇다고 했다. 자기 방도 잘 못 찾는 약간 치매기가 있는 할머니를 침대에 누여 드리고 복도에 나오니 어느새 창 밖이 훤해 오고 부지런한 새들의 청아한 노래 소리가 들렸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그날도 대학병원에서 오후 근무를 마치고 집에 오지 못하고 곧바로 다른 병원으로 밤 근무를 나간 날이었다. 초저녁에는 환자들 처치도 있고 환자들과 상담도 하면서 별로 피곤한 줄 몰랐는데 환자들이 다 자러 들어가고 나니 병동이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간호사 사무실에 있는 큰 전등은 끄고 책상 위에 작은 등만 밝히고 앉아 있으니 못 견디게 잠이 쏟아졌다. 몰려오는 잠을 쫓으려고 복도에 나가서 서성거리기도 하고 발코니에 나가 찬바람을 쐬기도 했다. 그러다가 새벽 2시가 넘으니 눕고 싶어서 허리가 뒤틀렸다. 시체가 있는 침대라도 하나 있으면 옆에 가서 눕고 싶을 만큼 쏟아지는 잠을 참기가 힘들었다. 밥은 한두 끼 안 먹어도 견딜 만한데 며칠 동안 이중 근무로 잠을 못 잤더니 돌 것만 같았다. 나는 잠도 쫓을 겸 배도 출출해서 계란 하나를 삶아 먹으려고 부엌에 들어가 전기 풍로를 켜고 냄비를 올려놓았다.
분명히 눈을 뜨고 있었는데 그후 시간이 얼마 지났는지 모르겠다. 갑자기 펑하고 무엇이 폭발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서 정신이 번쩍 들어 부엌에 가보니 불 위에 올려놓은 계란이 터져서 폭탄처럼 사방으로 흩어졌고 냄비는 벌건 불덩어리였다. 겁이 덜컥 났다. 나를 못 견디게 괴롭히던 잠도 천리나 달아났다. 그날 밤 나는 그 스테인리스 냄비를 닦느라고 팔이 떨어져라 고생했지만 까맣게 탄 밑바닥은 지울 수가 없었다. 그 병동 수간호사는 수녀였다. 아침에 수녀 간호사가 나오면 뭐라고 해야 하나 걱정이 태산이었다. 나는 어떻게 변명을 할 길이 없어 인계를 하면서 환자한테 가서 일을 하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내 실수이니 내일 새 것으로 사다 놓겠노라고 했더니 일하다가 그랬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고 걱정 말라고 하면서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잠이 그리 무서운 것이어서 형벌 중에서도 가장 혹독한 형벌이 잠을 안 재우는 것인가 보다.
브라질로 이민 간 남편이 독일로
그럭저럭 일 년이 지나갈 무렵, 브라질로 이민을 떠난 남편이 일주일 후에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한다는 전화가 왔다. 근무중에 뜬금없이 걸려 온 남편 전화에 나는 반가운 것이 아니라 너무 당황해서 화가 났다. 아니 이민 간 지 서너 달도 안 되었는데 그새 못 참고 쪼르르 여길 온다고 하는지, 같이 있을 준비도 안 되어 있는데 갑자기 오면 또 어떻게 할 것인지 싶어 괘씸한 생각까지 들었다. 그때 우리 계획은 남편은 브라질로 가고 나는 여기서 삼 년을 보낸 후 그곳으로 가서 합류하기로 되어 있는데 갑자기 여기로 온다니 보통 낭패가 아니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나니 야속했던 마음은 어디 가고 빨리 만나고 싶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근무가 끝나면 나는 곧장 시내 백화점에 나가서 남편 잠옷도 사다 놓고 실내화며 이것저것 준비했는데 그 일주일이 왜 그리 더디 가는지 답답했다. 밤이면 머릿속에 술렁대는 여러 생각들에 잠을 설쳤다.
일주일 후 드디어 남편이 탄 루프트한자가 착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나왔다. 출구에 나온 남편을 보는 순간 또 한 번 실망을 했다. 얼굴 여기저기는 모기에 물린 자리가 덧나서 툭툭 불거지고 제멋대로 자란 수염이 그렇게 지저분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말끔하니 신수 좋던 모습은 찾아볼 길 없고 폐인같이 변해 버린 모습에 반가움은 어디 가고 그저 어이가 없어 얼떨떨했다. 슬프고 고단한 내 인생의 서곡이 공항에서 시작되고 있는 순간이었다.
그날 밤 남편은 사전에 나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갑자기 오게 된 것을 무척 미안해하며 밤을 새워 가며 그 동안 남미에서 겪은 일들을 풀어 내느라고 시간 가는 줄을 모르는 것 같았다.
상하(常夏)의 땅, 남미 브라질을 향해 유토피아의 꿈을 안고 떠난 남편은 목적지인 브라질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중간 지점인 파라과이의 수도인 아순시온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고 한다. 브라질행 책임을 맡고 있는 브로커는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고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는 동안 가지고 간 돈과 물건은 축이 나 바닥을 드러내게 되었고 비단이 한 끼더라고 나중에는 가지고 간 고춧가루까지 다 팔아먹게 되어 염치없지만 독일행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남편 얘기를 다 듣고 나니 야속했던 마음은 사라지고 잘해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준비과정 없이 시작된 남편의 독일 생활은 처음부터 평탄할 리가 없었다. 눈 깜작할 사이에 여행 비자가 만기되는 석 달이 지나자 체류가 우선 고민이었다. 두 달을 더 연장했지만 그 기간도 훌쩍 지나가 버리고 불법 체류자 신세가 되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곳 독일도 체류 문제가 아주 까다로웠다. 경제 사정이 나빠져 실업자가 날로 늘어나 거리에 넘쳐 나니 외국인을 통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뾰족한 수가 없어 궁여지책으로 우선 출국신고를 해놓고 남편을 방 안에서 한 발자국도 밖에 못 나오게 했다. 그런 상태로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외국인 관청에서 남편이 정말 출국했는지 확인을 나왔는데 영문을 모르는 남편이 그만 문을 열어 준 것이었다. 재수 없게도 하필이면 내가 근무 나가고 없을 때 일이 터진 것이다. 남편이 출국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관리가 법원에 통보하여 며칠 후 법원에서 출두 명령이 내려졌다. 우리는 여태까지 경찰서나 법원을 모르고 살았는데 출두 날짜가 임박해 오자 불안해서 잠이 안 왔다.
궁하면 통하더라고 이리저리 머리를 짜서 궁리한 끝에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에 나가서 파리에서 오는 손님으로부터 어렵게 기차표를 하나 얻어 놓았다. 남편이 파리에 있다가 다시 들어온 것처럼 꾸미기 위해서였다.
법원에 간 날, 잔뜩 긴장을 해서 그런지 우리 차례를 기다리는데 시간이 멈춰 버린 것같이 지루하고 답답했다. 드디어 차례가 되어 우리 내외는 잔뜩 얼어 가지고 그들 앞에가 죄인처럼 머리를 숙이고 앉았다. 남편은 한쪽 다리를 떨면서 좌불안석이었다. 남편 다리 떠는 습관은 마음이 불안할 때마다 본인도 모르게 나오는 증상이었다. 남편은 어차피 독일어를 못 하니 오늘의 성패는 내 세 치 혀에 달려 있는 셈이었다. 그들의 소개가 끝나자 나는 먼저 그들에게 남편은 독일어를 못 하니 내가 설명을 하겠노라고 양해를 구했다. 나는 가방을 열고 기차표를 꺼내 그것이 무슨 대단한 증거물이나 되는 양 그들 앞에 보이면서 그들 마음을 움직일 수 있도록 목청을 가다듬어 상황을 간절하게 설명을 했다. 내 설명을 끝까지 진지하게 듣고 난 그들은 작은 목소리로 자기들끼리 몇 분 간 말을 주고받더니 의견일치를 보았는지 가운데 앉은 판사가 우리를 지긋이 내려다보며 삼 년 체류를 그 자리에서 허락해 주었다. 가슴 두근거리며 걱정했던 일이 이리 쉽게 풀릴 줄이야! 우리 내외는 뛸 듯이 기뻤다. 법원은 생각같이 무서운 곳도 아니었고 법관들도 모두 친절했다.
삼 년이나 파격적인 체류를 받게 된 것은 내 혀의 효력이 아니라 아마 동산만큼 불러 온 내 배가 그들 마음을 움직인 모양이었다.
내가 한국에 두고 온 자식들 때문에 날마다 애탄자탄하니까 남편은 나를 졸라서 서른다섯 늦은 나이에 아이를 갖게 되어 임신 7개월째 접어들었는데 해산달이 가까운 것처럼 배가 유난히 불렀다.
만득자에 덕이 있나니
법원 문을 밀고 나오는데 ?만득자에 덕이 있나니……?라는 계룡산 보살이 내게 해준 말이 문득 머리에 떠올랐다.
보살님, 만득자가 무슨 뜻입니까??
그 당시 아직 서른이 채 안 된 나는 그 말뜻을 알아들을 수 없어서 다시 물었다.
삼십 넘어서 낳은 자식을 만득자라고 합니다.?
그때 나는 이미 남매를 두었고 가족계획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서른 넘어서 또 자식을 두게 된다니 믿기지도 않는 얘기였다. 그러나 지금 서른다섯 늦은 나이에 배가 불러 있지 않은가.
그때 독일 취업을 결심해 놓고도 어린 자식들을 놔두고 가야 하나 가지 말아야 하나 갈피를 잡을 수 없어 아는 언니와 비지땀을 흘리면서 계룡산 중턱에 있는 보살을 찾아갔을 때 내 관상을 요모조모 뜯어본 후 보살이 내게 해준 말이 다시 생각났다.
우리는 재혼 부부
이제 체류를 받았으니 파라과이에 있는 아이들을 빨리 데려와야만 했다. 남편은 내 눈치를 보느라고 말도 못 하고 속으로 애를 태우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같이 낳은 자식도 아닌 아이들 둘을 친구에게 맡겨 놓고 자기만 왔으니 말이다. 우리는 재혼한 부부다. 파라과이에 있는 두 아이는 남편 자식이고 내 아이들은 강경 친정에 맡겨 놓고 독일에 왔다. 우리가 부부가 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첫째 나는 두 자식을 데리고 재혼하고 싶지 않았고, 둘째는 부모님의 반대가 심하셨다. 유교사상이 철저하신 아버지는 아무리 당사자의 인품이 훌륭하다고 할지라도 재혼을 절대 이해하려고 안 하셨다. 서방이 못쓰게 생겼으면 자식보고 그냥 살아야지 재혼은 무슨 재혼이냐고 펄펄 뛰셨다. 남편이 절을 올리면 절을 안 받고 벌떡 일어나서 나가셨다. 아버지는 읍에서 거행되는 현충일 행사 때는 흰 모시 두루마기를 입고 나가 축을 읽으시는 등 강경에서는 유지 축에 드셨다. 부모님은 무엇보다 체면을 중히 여기는 분들이셨다.
그러나 남편의 집념도 꺾이지 않았다. 아무리 부모님이 반대하시고 문전박대를 해도 소용없었다. 내가 완강하게 버텨도 나를 놓아 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자기 집에서 나와 아예 강경에 여관을 정해 놓고 머물면서 날만 새면 날마다 우리 집 주위를 빙빙 돌았다. 아이들 보기도 뭣하고 마음이 불안하여 서울로 가면 또 서울까지 따라왔다. 부모님이 어떻게 대해 주시든 내가 어떻게 나오든 개의치 않았다. 그만큼 수모를 당했으면 생각을 바꿀 때도 되었는데 속이 없는 사람 같았다. 남편은 간을 빼놓았는지 나한테는 말할 것도 없고 가족들한테도 일심정성이었다. 나도 그이가 싫지 않은 판에 목을 매고 따라다니니 결국 마음을 바꿔 인생을 다시 시작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내 자식을 떼어놓고 산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남편에게 먼저 다짐을 받았다.
난 당신 덕에 앞으로 쌍가마를 탄다고 해도 내 자식 떼어놓고는 못 살아요. 시골에 있는 당신 아이들도 데려오세요. 언제까지 어머니 아버지께 맡겨 놓겠어요.?그때 남편 아이들은 시부모님이 보살피고 계셨다.
자식이 넷이라고 생각하자고요. 부모가 이혼하고 재혼하는 동안 제일 큰 피해자는 아이들이니까 우리는 자식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며 노력하기로 해요.?
파라과이에 있는 아이들
이왕 데려올 자식들이니 하루라도 빨리 데려와야겠기에 우리는 서둘러서 비행기 티켓을 파라과이로 보냈다. 그때 딸아이가 여덟 살이고 아들아이는 열한 살이었다. 열둘 살부터는 성인 요금을 내야 하는데 다행히 열둘 살이 아직 안 되어 비행기 요금을 절약할 수 있었다. 티켓을 보낸 닷새 후에 남편 친구가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갑자기 세 식구가 늘었으니 거처할 방이 급하게 필요했다. 큰 집을 구할 수 없어 나는 기숙사 방을 그대로 가지고 있고 인근에 방 두 칸짜리 아파트를 하나 구했다. 나는 얼마 동안 기숙사와 그 아파트를 왔다 갔다 하며 지냈다. 어느 날 독일인 집주인이 두 남자 중에 누가 네 남편이냐고 물었다. 한 집에 남자가 둘이 있으니 이상하게 생각했다.
아이들은 독일 학교에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갑자기 바뀐 환경에 어린 딸아이는 적응을 잘해 나가는데 세 살 위인 아들아이는 처음부터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나는 시간을 내서 담임선생을 찾아다니는 등 아이들을 위해 노력했다. 한편으로는 친정에 있는 내 자식들을 데려오려고 한국과 자주 연락을 했다. 그러나 애들 아빠가 동의를 안 해줘서 날마다 눈물바람하며 속을 태웠다. 애들 아빠는 내가 혼자 살고 있으면 보내주겠는데 다른 남자와 살고 있으니 보낼 수 없다고 했다. 자기도 재혼하여 다른 여자와 자식 낳고 살고 있으면서 마치 자식을 무슨 자기 소유물인 양 생각하는 것 같아 더욱 속이 상했다. 같이 살 때는 한 달이면 반 이상을 자기 어머니한테 가 있고 애들이 어떻게 지내든 나 몰라라 하더니만 이제는 아버지 권리를 주장하며 아이들을 자기가 맡겠다는 것이었다.
애들 아빠가 집에 있는 날보다 없는 날이 더 많으니 오죽하면 옆집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나를 두고 주말 과부라고 놀리는 사람도 있었다. 애들 아빠가 내내 집에 없다가 주말에만 오기 때문이었다. 어떤 이는 ?나 이제 속을 아니까 말인데 자기가 세컨드인 줄 알았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당시 시어머니는 마흔 중반에 홀로 되어 살고 계셨는데 장가들어 자식까지 둘이나 둔 아들을 옆에 끼고 있으려고 하셨다. 공주 장날이면 계란 몇 줄을 들고 나오셔서 ?애비 얼굴이 그게 뭐냐? 돼지고기 좀 해먹이지, 가자? 하시며 아들을 앞세우고 찬바람 나게 시골집으로 가셨다. 내가 보기엔 애 아빠 얼굴은 멀쩡하기만 한데 왜 저러시나 하고 시어머니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애들 아빠와 나는 일곱 살 차이였는데 아이만 일찍 낳았지 나는 아직 철부지였다. 여러 해가 지난 후에야 나는 그때 시어머니가 하셨던 그 숨은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십 년 만에 얻은 아들 만득자
아이들을 데려올 수 없는 나는 아버지 편지에 마음을 의지하고 날마다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한국에서 근무할 때도 애들 걱정에 하루 출장도 마음 놓고 못 다니던 나였는데 이제 아이들을 내 품에 두고 키울 수 없으니 억장이 무너져 내릴 뿐이었다. 친정 아버지는 나를 위로하느라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반장에 뽑혔다는 소식도 전해 주셨고, 학교에서 타 오는 우등상장과 피아노 대회에서 받은 상장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사진과 함께 보내주셨다. 아이들도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엄마 보세요?라고 편지를 써서 보내주었다. 나는 아이들 편지를 베개 밑에 넣어 두고 애들이 보고 싶을 때마다 꺼내 읽었다. 남편이 잘해 줘도 좋은 일이 있어도 좋은 줄을 모르겠고 내 얼굴에서 기쁨은 사라지고 울다가 잠드는 날이 많았다. 내 베개는 마를 날이 없었다. 남편이 나에게 아이를 하나 더 낳자고 끈질기게 설득한 것도 날이면 날마다 울어 대는 나를 달래기 위해 그 길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여보, 우리 아직 젊은데 아이 하나 더 낳자고. 자식이 넷 있다고 해도 우리 둘만의 자식은 없잖아???미쳤어. 당신도 참, 이 나이에 아기는 무슨 아기예요, 남부끄럽게.??우리 나이가 어때서 그래, 피카소는 여든 살에 아기를 낳았다고.??자기가 피카손가 뭐. 그 사람은 유명하고 돈이라도 많지만 우리 같은 빈털터리가 자식만 많으면 뭘 해요. 주책 그만 떨어요. 난 있는 자식 가지고도 가슴이 터지려고 해요.?그런데 사람 마음은 이상한 것이었다. 그렇게 완강히 버티던 내가 복용하던 피임약을 중단하니 바로 아이가 들어섰다. 결국 아이를 갖게 된 것은 남편의 설득 때문만이 아니라 내 마음이 그리 기운 것을 보면 계룡산 보살이 예언한 대로 내 팔자에 있는 그 ?만득자?인 것이었다.
한국에 있는 딸을 낳고 꼭 십 년 만에 얻은 아들이었다. 삼십대 중반에 아들을 얻게 된 나는 아이를 키우는 재미에 흠뻑 빠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이전처럼 날이면 날마다 흘리던 눈물도 줄어들었다. 마흔도 넘어 자식을 본 남편도 세상에 없는 자식인 양 막내아들이라면 벌벌 떨 정도로 야단스러웠다. 만득자인 아들은 우리 집에 꽃이었고 나를 십 년은 더 젊은 엄마로 되돌려 놓았다.
화투판을 깨다
이제 남편의 제일 중요한 체류 문제는 해결되었고 막내아들의 재롱을 바라보며 우리 내외는 마음의 안정을 서서히 되찾아갔다. 그러나 노동허가서가 없으니 내놓고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다. 아내는 일하러 나가고 허우대 멀쩡한 장정이 허구한 날 할일없이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은 어쩌면 하나의 형벌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우리 집에 남자들이 놀러 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남편이 적적해할 것을 생각해 오시는 분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한국 남자들은 셋만 모이면 화투장을 잡았다.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래도 적적한 남편한테 친구가 되어 주는 것이 고마워서 커피도 끓여 내고 때 되면 식사도 준비하여 찬 없는 밥이지만 귀찮은 줄 모르고 대접했다. 그러나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나는 이 병원 저 병원 일 다니느라 지쳐 있는데 이삼 일이 멀다 하고 모여 화투판을 벌이니 처음에 고마웠던 마음은 사라지고 이제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남편도 밤을 새워 화투를 치고 나면 다음날은 ?아이고 허리야 다리야? 하며 끙끙 앓는 소리를 했다. 우리 집 거실은 남자들이 밤새 피워 댄 담배 연기로 마치 굴뚝같았다. 그들이 모이는 데에는 늘 그럴싸한 이유가 있었다. 어제는 김 형이 잃었으니 쳐줘야 하고 오늘은 내가 땄으니 또 쳐야 했다. 남자들은 한 판만 한 판만 하면서 번번이 밤을 새웠다. 그것은 일종의 마약과 비슷한 것인가 보았다.
두고 봐, 오늘 12시까지 안 끝내면 화투판을 엎어 버리고 말 거야!?나는 저녁을 먹고 나서 사람들이 모이기 전에 남편한테 엄포를 놓았다.
여보, 이번은 틀림없어. 두고 보라고.?
약속만 해놓고 이행을 못 하던 남편은 오늘은 틀림없을 테니 두고 보라고 장담을 했다. 그러나 12시가 넘어도 사람들은 일어날 생각을 안 하고 계속해서 화투장을 돌렸다. 오늘도 밤을 새울 모양이었다. 초저녁에 큰소리를 쳤지만 남편 체면 때문에 차마 화투판을 둘러엎을 수는 없었다. 이런 과격한 방법 말고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던 나는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화투장이 48장이니 거기서 몇 장 빠져 짝이 안 맞으면 못 칠 것이다. 나는 이튿날부터 남편 몰래 오늘은 공산명월과 흙 싸리 열 끗, 다음날은 오동 광과 난초 다섯 끗, 이런 식으로 화투장을 한두 장씩 살짝살짝 내다 버렸다. 남자들은 처음에는 없어진 화투장 대용으로 빳빳한 종이나 종이상자를 오려내어 사용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두 장 빠졌을 때 얘기지 여러 장을 그런 식으로 대용하니 재미도 없고 화투판에 오간 돈을 가지고 의견 충돌이 생겼다. 말은 재미로 한다고 시작하지만 끝나고 나면 한 사람은 으레 얼굴을 붉히고 일어섰다. 이상한 것은 어찌 되었는지 화투판에는 땄다는 사람은 없고 늘 잃었다는 사람만 있었다. 결국 우리 집에서 저녁마다 열리던 화투판은 흐지부지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한인회 부회장이 된 남편
내가 그토록 싫어하던 화투판이 깨져서 다행이다 싶었는데 한 달도 안 지나 내 속을 썩이는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직장이 없는 남편은 내가 일하러 나가고 나면 아이를 돌보며 가사 일을 도왔다. 나는 다른 병원 일까지 다니기 때문에 집에 있을 시간이 얼마 없었다. 큰아들녀석은 ?엄마는 집에 전기 스위치가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른다?고 할 정도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다녔다. 어쩌다가 집에 있는 날은 일자리가 없기 때문이니 그야말로 비 오는 날이 공치는 날인 셈이었다. 그렇다 보니 남편은 자연히 때가 되면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 밥도 해먹여야 할 처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 프랑크푸르트 한인회에서 한 가지 제안이 들어왔다. 그날은 마침 일자리가 없어 아들 재롱을 보며 가족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남자 분 셋이 찾아와서 남편을 한인회 부회장에 추대하고 싶다고 했다.
우리 춘웅이 엄마한테 물어보세요.?
남편은 자기가 결정할 일을 내 눈치를 살피며 은근히 그 대답을 나에게 미루었다. 남편 얼굴 표정을 보니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기야 생각해 보니 남자가 날마다 집에서 아기나 보고 가사 일만 하고 있으니 밖에 바람을 쐬고 싶은 것도 당연했다. 어쩌면 남편한테도 좋은 기회다 싶어 그 의견에 찬성을 했다. 그렇게 해서 남편은 프랑크푸르트 한인회 부회장이 되었는데 생각지 않은 많은 문제점을 우리 가정에 가져오게 될 줄은 몰랐다.
남편은 한인회 일이라며 하루가 멀다 하고 여태까지 하던 일을 놔두고 밖으로만 나돌았다. 나는 자기를 믿고 어린 아들을 떼어놓고 이 병원 저 병원으로 일을 다니고, 사춘기에 접어든 큰 아이들도 그렇고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다. 어느 날은 한인회 임원들이 우리 집에 모이는 날도 많았다. 밤 근무를 하고 나면 잠을 자야 하는데 밖에서 두런거리니 신경이 쓰여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임원들이 거실에 가득 모여 있으니 화장실 가는 것도 불편했다. 우리 집 화장실은 거실을 거쳐가야 하기 때문에 잠옷 바람으로 갈 수도 없었다. 나는 얼마 안 가서 시도 때도 없이 몰려다니는 한인회에 넌더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홍역 때문에 열이 39도가 넘는 아이를 놓고 밤 근무를 나왔는데 아이 약 먹일 시간이 되어 집에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밤 12시가 지났으니 큰 아이들은 깊이 잠들어 전화 소리를 못 듣는 모양이었다. 요즘같이 핸드폰이 있는 시절이 아니어서 집으로 계속 전화를 해도 마찬가지였다. 애가 탄 나는 근무 도중 택시를 불러 타고 집에 와서 현관 밑에 세워 놓고 올라가 보니 남편은 없고 아이는 불덩어리였다. 아픈 아이한테 약을 먹여 놓고 울며 보채는 아이를 떼어놓고 밑에 대기중인 택시를 타고 병동으로 가는데 남편에 대한 실망과 분노로 머리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이튿날 새벽 밤 근무를 끝내고 집에 돌아왔을 때, 남편은 어젯밤에 내가 집에 왔다 간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 일로 인해 나의 참을성은 한계에 도달했다. 남편은 싸늘해진 내 표정으로 사태를 눈치 채고 빌었지만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여태까지 큰 아이들이나 여러 가지 문제로 해서 어려움이 많았지만 한 번 이혼하더니 또 이혼한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참고 넘겼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가정을 나 몰라라 하는 첫 남편한테도 덴 내가 또다시 그런 꼴을 보고 살기는 싫었다.
며칠 후 아이 열이 내리자 나는 같이 안 가려고 하는 남편을 억지로 끌고 아이를 안고 본으로 가는 열차를 탔다. 지금은 각 지역 총영사관에서 모든 교민 서류를 처리하지만 당시에는 결혼신고나 이혼신고도 본 대사관에 가야만 할 수 있었다. 기차가 코블렌츠 역에 도착하자 6분 가량 정차한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남편은 아이를 안고 잠깐 바람을 쐰다며 홈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기차 출발 시각을 알리고 있는데도 남편은 기차에 오르려 하지 않고 나보고 빨리 내리라고 손짓을 했다. 나는 기차 출입구 계단에 매달려 빨리 타지 뭐하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빼에 엑.?
기차가 출발 신호를 울렸다.
마마 마마!?
아들이 울음을 터트리며 제 아빠 품을 벗어나 나에게 오려고 발버둥을 쳤다. 기차가 떠나려는 아슬아슬한 찰나, 내 두 발은 자신도 모르게 홈으로 내려서서 아이를 받아 안았다. 남편은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나를 끌어안았다. 또 한 번 운명이 뒤집어지려던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우리 세 식구는 방향을 바꿔 프랑크푸르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바위같이 단단한 것도 사람의 마음이요 달걀보다 더 쉽게 깨지는 것도 사람 마음이었다.
그후 남편은 한인회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도중 하차하여 가정에 충실했다.
막노동에 나선 남편
화투판도 깨지고 한인회 일도 그만두자 소일거리가 없어진 남편은 무위도식하는 자기 처지를 부끄럽게 생각하더니 얼마 지나자 일자리를 찾아나섰다. 남의 집 도배도 해주고 페인트도 칠하는 등 마른일 궂은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했고 생전 안 해본 일도 찾아다니며 조금씩 벌어다가 가계를 도왔다. 남의 집수리를 끝내고 온 날은 온몸이 페인트투성이가 되어 돌아왔다. 할 줄 모르는 일을 하느라고 페인트를 여기저기 묻히는 것 같았다. 빙긋이 웃으며 현관에 들어서는 남편을 보면 겉으로 내색은 안 했지만 속으로는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혈색이 좋아진 남편을 보면 그런 대로 위안이 되었다.
남의 집수리를 맡은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남편은 아침을 먹으며 오늘은 한 시간만 일하면 500마르크를 받아 올 수 있다고 하며 기분 좋게 집을 나갔다. 남편이 돌아올 시간에 맞춰 좋아하는 특별 메뉴인 김치 삼겹살 볶음을 해놓고 기다려도 한 시간만 일하면 돌아온다던 남편은 두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기다리는 남편은 안 오고 전화벨이 따르릉 울렸다. 남편이었다.
여보, 나야.?
아니 빨리 오지 않고 왜 전화해요, 배고파 죽겠는데.??여보, 이 일을 어쩌지? 일을 다 끝내고 돈도 받아 가지고 밖에 나왔는데 우리 차가 없어졌어. 찾아봐도 없는데 어떻게 하지??남편 목소리는 풀이 죽어 있었다. 나는 전화번호부를 찾아 여기저기 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주차금지 구역에 차를 세웠기 때문에 경찰이 끌어간 것이었다. 남편 말이 한 바퀴 돌아도 주차할 자리가 없어 한 시간이면 되니까 빨리 끝내고 나오면 되겠지 하고 세워놓은 것이 잘못이었다.
나는 서둘러서 남편 있는 곳으로 갔다. 페인트가 얼룩덜룩 묻은 사다리와 페인트 통까지 들고 길가에 서 있는 남편 모습이 서커스에 나오는 사람 같았다. 전차를 타고 경찰이 일러준 대로 찾아가 보니 우리 차를 끌어다 놓은 곳은 시내에서 제법 떨어진 곳이었다. 자동차 끌어간 값에다 벌금까지 물고 차를 도로 찾아 타고 오며 남편은 무척 계면쩍어 했다.
500마르크 받은 데에서 조금 덜 번 셈치지 뭐. 그러나 다음부터는 조심해요, 알았죠!??옛 써!?
남편은 오른쪽 손바닥을 자기 이마에 올려붙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속이 상했지만 염치없어 저러는 남편 얼굴을 쳐다보고 그냥 참고 넘어가기로 했다. 어디나 그렇겠지만 독일은 법이 칼날같이 무서운 나라다. 그 일이 산교육이 되었는지 남편은 그후 교통법규를 철저히 잘 지켰다.
채소 농사
남의 집수리도 날마다 있는 일이 아니어서 우리는 프랑크푸르트 교외에 있는 밭을 하나 얻어서 채소를 가꾸기로 하였다. 쉽게 생각하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농사에 경험이 전혀 없다 보니 여간 힘이 드는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밭에 물이 없어 며칠씩 가물 때는 자동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개울에서 물을 퍼 날라야만 하니 더욱 힘이 들었다. 배추나 무가 제 모양을 갖추기까지 우리는 무척 고생을 했다. 그렇게 고생고생하며 정성을 들여 키웠건만 채소는 꾀죄죄하고 볼품이 없었다. 못생겼어도 총각무와 배추를 뽑아서 목욕탕에 가지고 와서 대충 씻어 놓고 보니 몇 달 동안 정성을 들인 채소여서 그런지 여간 사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목욕탕에서 대충 샤워를 하고 나온 배추와 총각무는 밭에서 볼 때보다는 그런 대로 좀 때깔이 났다. 말끔해진 채소를 몇 개씩 모아 다발로 묶어 놓으니 목욕통에 그득했다. 역시 흙은 정직해서 우리에게 기쁨을 선사했다. 그러나 장사라고는 해본 일이 없는 우리는 어디 가서 팔아야 할지 막막했다. 그때 기발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옳지! 교회로 가자.?
일요일이면 한인교회에는 신도들이 많이 모인다는 얘기를 들었다. 일요일 예배시간에 맞춰서 우리는 채소를 한 차 가득 싣고 한인교회 앞으로 갔다. 숫기가 없는 남편은 사람들 만나기가 민망했던지 차에서 내리자마자 이 근방에 건물들이 쓸 만한가 돌아보고 오겠다며 담배 한 대를 물고 슬며시 교회 뒤 주택가로 가버렸다.
이윽고 예배가 끝나자 교인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내 차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채소 다발을 집어 들고 값이 얼마냐고 묻는데 나는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도 제대로 못 들고 모기만한 소리로 그냥 알아서 달라고 했다. 그 광경을 옆에서 보고 있던 젊은 교인 한 분이 내 모습이 답답하고 숙맥 같아 보였던지 앞으로 나서 가지고 이것은 3마르크, 저것은 5마르크 하면서 모두 팔아 주었다. 나는 그때의 고마움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교회 앞마당이 거의 비어 갈 무렵에 남편은 슬그머니 차 옆으로 나타났다.
그렇게 채소 장사로 번 돈은 미미한 액수였지만, 나는 이튿날 시장에 나가 지갑을 하나 사서 그 안에 돈을 넣어 ?자, 당신 용돈이야? 하며 남편에게 줬다.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당신이 고생하고선…… 미안해 여보.?남편은 공연히 눈을 몇 번 끔벅거리더니 담배 한 개비를 빼들고 얼른 화장실로 가 버렸다.
피부가 검은 나는 잠깐만 햇볕에 나가 있어도 구릿빛으로 타는데 봄여름 내내 밭에서 산 덕분에 이제는 아프리카 사람들처럼 아예 깜둥이가 되고 말았다.
피아노와 딸들
한국에 있는 딸은 일 년 전부터 피아노를 갖고 있었다. 날마다 학원에 다니기 때문에 피아노가 꼭 필요하다고 해서 사준 것이다. 여기 있는 딸아이가 한 살 위인데 한국에 있는 딸만 피아노를 사주게 되어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다. 우리 집 사정이 피아노 살 형편이 아니었지만 일을 저지르기로 했다.
여보, 우리 현이 피아노 사줘야겠어요.?
밭에서 일하고 들어온 남편과 마주앉아 저녁을 먹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남편의 반응은 의외였다. 남편이 좋아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화를 내며 소리까지 질렀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피아노 살 돈이 어딨어??
언제는 우리가 돈 묶어 놓고 살았나. 배움에는 다 때가 있는 거라고요.?며칠 후 나는 남편이 뭐라고 하거나 그냥 피아노를 사다가 놓고 딸아이를 피아노 학원에 보냈다. 딸아이도 무척 좋아했다.
그 당시 노동허가서가 없는 남편은 직장을 잡을 수 없어 일정한 수입이 없고 여기저기서 푼돈을 벌어오는 정도였다. 그러니 자기 처지를 생각하고 피아노 사는 것을 반대하였을 것이다. 여기 있는 딸아이와 한국에 있는 딸하고 한 살 차이였다. 자식 욕심은 누구나 다 똑같을 것이다. 한국에 있는 내가 낳은 딸은 피아노를 치고 있는데 여기 있는 딸아이는 같이 낳은 자식도 아니니 말도 못 하고 어찌 아비로서 속이 아프지 않았을까. 나는 남편의 마음을 헤아려 보며 우리 형편에 무리인 줄 알면서도 남편과 딸아이를 위하여 피아노를 사온 것이었다.
피아노를 사다가 놓고 처음에는 딸아이한테 개인 레슨을 시키다가 시립 음악학교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러나 몇 년을 다니던 딸아이는 자기는 취미가 없다면서 제 손으로 사표를 써서 내고 말았다. 내가 만류해도 소용없었다. 그뒤부터 피아노는 거실에서 먼지만 쓰고 있게 되었다.
이 년 전, 한국에 나가 딸을 초등학교 입학을 시키면서 피아노 학원에 보냈다. 딸이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중학교 다닐 때 나는 그렇게도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다. 그러나 어려운 가정형편에 점심도 굶어 가며 학교라고 간신히 다니고 있는데 피아노는 그림의 떡이었다. 그래서 딸에게는 옷을 하나 덜 사주더라도 피아노 배울 기회를 주고 싶었다. 첫날 피아노 학원에서 돌아온 딸은 요강을 타고 앉아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제 무릎 위에서 건반 누르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딸이 다니던 피아노 학원은 집에서 상당히 멀어서 처음에는 아버지가 손녀딸을 업고 다니셨다. 딸은 조금 크자 애들이 흉본다고 할아버지 등에 업히려 하지 않았다. 그후 아버지는 자전거를 어디서 구하셨는지 짐받이에 방석을 올려놓고 손녀딸을 그 위에 태우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날마다 다니셨다.
처음 피아노 학원에 보낸 것은 취미로 하라고 보냈는데 딸은 그 방면에 재주가 있는지 아니면 연습을 많이 하는지 하여간 피아노 대회에 나가 여러 번 상을 타왔다. 그러다 보니 강경 소도시에서 시작했지만 논산, 대전을 거쳐 나중에는 더 나은 선생을 찾아 서울까지 다니며 레슨을 받게 되었다. 부모님은 손녀딸이 피아노 대회에 나갈 때면 다른 자식들까지 모두 데리고 가서 제일 앞줄에 앉아 손녀딸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다. 어미 품에서 자라지 못하는 손녀딸이 딱해서 어머니 아버지는 각별히 신경을 쓰고 계셨다. 고등학교를 마친 딸은 공주사대 음대 음악교육과를 나와서 지금 음악선생으로 일하고 있다. 취미로 치라고 사준 피아노가 딸이 가는 길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줄은 몰랐다.
먹는 것이 남는 것이지
채소 농사는 날씨 좋을 때 한철 일이라서 밖에 찬바람이 나기 시작하면서 할 일이 없어진 남편은 또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애꿎은 담배만 피워 대던 남편이 어느 날 밖에 나갔다가 신바람이 나서 돌아왔다.
여보, 이번 주말에 벨기에 한번 다녀옵시다.?
아니 생뚱맞게 벨기에는 왜 가자고 그래요??
나는 놀러 가자고 하는 줄 알고 짜증부터 냈다.
내 말 들어봐, 잘만 하면 400마르크를 벌 수 있다고. 오펜바흐에 사시는 분인데 벨기에에서 오징어를 한 차 떼다가 팔았더니 휘발유 값 빼고도 400마르크나 남았다고 하잖아. 생선도 실컷 먹었고 재미를 톡톡히 봤다고 하는군.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기 아니오? 여보, 우리도 한판 뜁시다.?당시 내 봉급이 1,000마르크 정도였으니 400마르크는 아주 큰돈이었다. 남편은 내가 일하러 나가고 나면 심심하여 한국 식품점에 잘 갔는데 그곳에 물건을 사러온 미군과 같이 산다는 한국 여자 분이 하는 소리를 듣고 귀가 솔깃해서 집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얼마 안 있으면 명절도 돌아오고, 한국에 돈도 부쳐야겠기에 걱정되던 판에 남편과 저녁을 먹으며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나 역시 은근히 구미가 당겼다. 마침 이번 주는 쉬는 주말이니 잘 됐다 싶었다.
저녁을 먹은 후 지도를 펴놓고 보니 프랑크푸르트에서 벨기에의 해변도시 오스텐데(Ostende)까지는 대략 400킬로미터 정도 되는 거리였다. 토요일 새벽 1시쯤 출발하면 목적지인 오스텐데 부두에 새벽 6시쯤 도착할 것 같았다.
남편은 차를 끌고 주유소에 가서 기름도 가득 넣고 네 바퀴에 바람도 적당한지 점검하고 돌아왔다. 나는 큰 솥에 밥을 해서 내일까지 먹을 김밥을 넉넉하게 말고 보리차도 끓여 커다란 보온병에 담았다. 밤에는 기온이 내려가니까 담요도 두 장을 차에 실었다. 나는 남편보고 밤새워 운전을 해야 하니까 떠날 때까지 눈을 붙이라고 했지만 눕지도 않고 설렁대고 다니더니 11시도 안 되었는데 빨리 출발하자고 어린애처럼 조르기 시작했다. 미지를 향해 그것도 독일도 아닌 벨기에로 떠난다고 생각하니 불안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운전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남편의 운전 실력은 형편없었다. 남편 말이 아니더라도 내 생각도 일찍 출발하여 천천히 여유 있게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 11시 조금 지나서 출발했다. 깊은 밤 고속도로는 드문드문 차가 지나갈 뿐 아주 한적했다. 차창 멀리 어둠 저편으로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졸면서 고즈넉한 마을을 처량하게 비추고 있었다.
차가 달리기 시작하여 한 시간 가량 지났을 때 갑자기 하늘이 우르릉거리더니 비가 미친 듯이 퍼붓기 시작했다. 주먹만한 빗방울이 차 천장을 부술 듯이 요란스럽게 때리고 차 앞 유리창에 붙은 클리너를 아무리 빨리 작동시켜도 앞이 보이지 않았다. 남편도 나도 너무 긴장해 아무 말도 못 하고 숨을 죽인 채 앞만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우리가 죽으려고 나섰는가 싶은 생각이 들자 나는 더럭 겁이 났다. 나는 남편 손을 가만히 잡으며 담배 한대 피우며 쉬었다가 비가 그치면 가자고 했다.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남편은 기다리기라도 했는지 차를 길가에 세웠다. 남편 손은 땀이 배어 축축이 젖어 있었다. 말도 못 하고 얼마나 긴장을 했으면 저러랴 싶어 가슴이 짠했다. 이튿날 집으로 오며 얘기하는데 그때 남편도 너무 겁이 나서 차를 돌려 집으로 다시 가자고 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그 말을 못 했다고 한다. 우리는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긴장을 푸느라고 별로 우습지도 않은 얘기를 가지고도 마주보고 낄낄댔다.
얼마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납던 비가 수그러들었다. 남편은 벨기에를 향해 다시 가스 페달을 밟았다. 독일 국경을 넘어 벨기에 영토에 들어서자 고속도로는 마치 꽃등을 내다 건 것처럼 아름다웠다. 오르막, 내리막길이 무슨 축제라도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화려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벨기에는 밤에도 전 고속도로에 가로등을 켜놓는다고 한다. 잘산다는 독일은 가로등도 촉수를 낮춰 희미하게 켜놓는데 이렇게 전기를 안 아끼는 걸 보니 이 나라가 더 부자인가? 머리가 갸우뚱해진다.
휴게소에서 두 번이나 쉬고 천천히 달렸는데도 생각보다 일찍 오스텐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밤이라 고속도로가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름 모를 길가 가로등 밑에 차를 세우고 손목시계를 보니 시계 바늘은 4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도시는 희미한 가로등만 외롭게 지키고 있을 뿐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고속도로는 가로등을 대낮같이 밝혀 놓고 도시는 왜 이리 침침하게 해놓았는지 모르겠다. 가로등도 흐리고 처음 온 도시의 낯선 거리이고 보니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쯤인지 통 알 수가 없었다. 부두를 찾아가야 하는데 지나다니는 행인도 없으니 물어볼 데도 없었다. 아직 이르니 나는 남편보고 가지고 온 담요를 하나씩 덮고 날이 샐 때까지 눈을 붙이자고 했다. 그러나 남편은 내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빨리 나가서 알아보지 않는다고 생억지를 부렸다. 나는 가뜩이나 피곤한 판에 화가 나서 대꾸도 하기 싫어 입을 봉해 버리고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말을 안 하고 고개를 외로 꼬고 있으니까 남편도 잠잠해졌다. 둘이 그런 상태로 있기를 한 40분, 길 건너에 여러 사람들이 몰려나오는 모습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보니 기차역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저기 가서 물어보면 되겠구나 생각하고 남편한테 한마디 말도 없이 차 문을 쾅 닫고 거리로 나갔다.
여보, 가지 마. 내가 잘못했어. 당신 말이 옳아, 날 샐 때까지 차에서 한숨 자며 기다리자고.?남편은 허겁지겁 쫓아나와 내 팔을 잡고 늘어지며 제발 다시 차로 가자고 사정사정했다. 몇 발자국 옮겨 놓던 나는 남편의 하는 짓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픽 나왔다.
어이구, 체격 값이나 좀 해요. 덩치는 들썩 커 가지고 겁은 왜 이리 많은가 몰라. 이 새벽에 내가 가긴 어딜 가요. 저기 길 건너 큰 건물에서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보니까 반호프(Bahnhof) 같아서 거기 가서 물어보려고 하는데 왜 이래요.??에끼, 이 사람아. 그럼 그렇다고 진작 말할 일이지, 사람을 이렇게 놀라게 해!?무안해진 남편은 잡았던 내 팔을 뿌리치며 화를 버럭 냈다. 그러나 이 분도 못 되어 이내 내 옆에 바짝 따라붙었다. 사람들이 몰려나온 곳은 내 추측대로 기차역이었다. 알고 보니 우리는 부두에서 길 하나 비켜서 있었는데 낯선 도시라서 남편이 애를 태운 것이었다.
이윽고 6시가 가까워 오니 날이 훤하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찾아간 부두에서는 건건찝질한 바다 냄새와 생선 비린내가 물씬 풍겨왔다. 새벽 부두는 배마다 생선을 퍼 나르는 뱃사람들로 번잡하고 소란스러웠다. 고깃배 주변에는 바다 갈매기들이 끼룩거리며 어지럽게 날고 있었다.
우리는 오징어가 어디 있는가 하고 부둣가를 누비고 다녔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번뜩여 봐도 오징어 사촌도 볼 수가 없었다. 아마 오징어 때가 아닌 모양이었다. 남의 말만 듣고 돈 400마르크에 눈이 멀어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온 것이 불찰이었다. 기왕 힘들게 왔는데 휘발유 값이라도 빼려면 빈 차로 갈 수 없어 동태와 가자미를 얼음에 재워 한 차를 사서 실었다. 시간은 벌써 10시가 넘었다. 아침때가 지나서 배가 고팠다. 우리는 출발하기 전에 차를 한가한 골목에 세워놓고 준비해 간 김밥을 먹었다. 김밥은 먹을 만한데 보리차는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끈한 커피 생각이 간절했다.
아무리 멀리 갔어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가까웠다. 계획대로 오징어는 못 샀지만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생선을 한 차 가득 싣고 달리니 차에서 비린내가 풀풀 나도 기분이 좋았다.
집에 오니 오후 5시가 다 되었다. 겨울 해는 짧기도 해서 밖에는 어느새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생선은 신선도가 생명이니 오늘 중으로 처분해야 했다. 우리는 쉬지도 못하고 곧바로 차를 몰고 나갔다. 제일 먼저 방향은 니더라트(Niederrad)로 정했다. 니더라트에는 대학병원이 있어서 한국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우리는 고층아파트 앞에 차를 세워놓고 무조건 한국 이름만 붙어 있으면 체면 불구하고 초인종을 꾹꾹 눌렀다. 집에 사람이 있다는 반응이 오면 나는 무조건 말을 했다.
물 좋은 생선이 왔습니다, 한번 구경하세요.?
자꾸만 목구멍 안으로 기어들려고 하는 소리를 가다듬어 용기를 내어 사람들을 불러냈다. 남편은 이번에도 지난번 채소 팔러 갔을 때처럼 어디론가 슬쩍 사라져 버렸다. 사람들이 몰려나오자 교회 앞에서처럼 또 얼굴이 화끈거렸다. 고깃배가 드나드는 생선고지 강경읍에 오래 살았어도 그 유명한 강경 새우젓 한번 사러 간 일 없었는데 독일까지 와서 이번에는 생선장수가 되어 있었다.
이 집 저 집 다니며 안면 있다고 한두 마리 더 주고 이 집은 가족이 많으니 덤으로 더 주고 하다 보니 처음 계산했던 400마르크는 공수표가 되어 날아가 버렸고 겨우 휘발유 값 빼고 잔챙이 생선만 한 봉지 남았다. 밤이 이슥해서야 집에 돌아온 우리는 저녁도 거른 채 침대에 몸을 던졌다.
이튿날 나는 나머지 생선에 무를 쑹덩쑹덩 썰어 넣고 얼큰하게 매운탕을 한 솥 끓여 친구들을 불러모아 맥주 파티를 열었다. 먹는 게 남는 거지, 손해는 안 봤으니 이만하면 괜찮은 장사 아닌가!
남편의 첫 직장
남편은 이일 저일 가리지 않고 다니고 나는 나대로 다른 병원까지 다니며 열심히 일하고 있는 사이 삼 년이 흘러 이제 남편은 노동허가서도 받아 정식으로 내가 일하고 있는 대학병원에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처음 발령받은 곳은 식당이었다. 한국에서 사무직으로만 일했던 남편에게 식당일은 생소한 자리였지만 지금 더운밥 찬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프랑크푸르트 대학병원은 환자가 1,800명에 직원이 3,000명이나 되는 독일에서 두 번째로 큰 병원이다. 식사를 담당하는 부엌은 대형 공장이 연상될 정도로 컸다. 규모도 엄청 크지만 종업원도 얼마나 많은지 직원을 찾을 때는 마이크로 불러야 할 정도였다. 나는 이렇게 큰 부엌은 난생 처음 보았다.
부엌일이 서툰 남편은 근무 도중 자주 해프닝을 일으켜 동료들을 웃겼다고 한다. 부엌일은 세분화되어 있어서 자동으로 돌아가는 피대 위에 놓인 쟁반에 버터 놓는 사람은 버터만 놓고 나이프 놓는 담당은 나이프만 놓는데 남편은 그 타이밍을 못 맞춰서 저만큼 가버린 쟁반을 따라 뛰어야만 했다고 한다. 체격이나 자그만한가, 그 큰 덩치에 나이프를 들고 뛰는 모습만 상상해 봐도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래도 남편은 당당히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아서 싱글벙글이었다. 그렇게 반 년이 되어 갈 무렵 운전기사 자리가 나서 남편은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남편 하는 일은 큰 트럭으로 환자 음식을 병동으로 실어 나르는 일이었다. 대학병원은 전차 정거장이 세 개나 지나갈 정도로 커서 식사를 때마다 큰 트럭으로 병동에 배달하고 있었다. 남편의 새 일자리는 행운이었다. 일도 수월하고 남편도 적성에 맞는다고 했다. 첫째 독일어가 형편없는 남편은 말이 별로 필요 없으니 너무 좋아했다. 또 식사를 배달한 다음에는 환자들이 다 먹을 때까지 쉴 수가 있었다.
남편은 그 시간을 이용하여 파이프를 비스듬히 물고 나 일하는 부인과 병동에 올 때가 많았다. 복도에 들어선 남편 얼굴엔 환한 미소가 넘실거렸다. 한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 우리 부부는 근무중에도 마음만 먹으면 한두 번씩 만날 수 있는 느긋한 행복을 누리게 되었다. 가계도 다소 여유가 생기니 양쪽 부모님 생신 때나 명절 때 한국으로 돈을 부치는 데도 부담이 적었다. 남편은 봉급을 타면 제일 먼저 한국에 있는 내 아이들을 위해 지갑을 들고 우체국으로 달려갔다. 나는 다달이 아이들 학비를 부칠 수 있다는 것으로 작은 위안을 삼으며 아픈 마음을 달랬다.
늦게 낳은 아들의 재롱은 새로운 활력소가 되어 우리 가정에 생기가 돌게 했다. 처음에는 힘들어 하던 두 아이들도 차차 독일 생활에 익숙해져 갔다. 그러나 내 가슴 한편은 한국에 있는 두 자식 생각에 늘 가슴이 저렸다. 혹시라도 사춘기에 접어들고 있는 자식들이 상처받을까 봐 걱정되어 예쁘게 크고 있는 이곳 막내아들 얘기도 편지에 적지 않았다.
오직 아버지 편지에 의지하며 아픔을 달래며 사는 동안 흐르는 세월 속에 자식들은 탈 없이 자라 아들이 중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부터 내 가슴속에 또 하나의 새로운 슬픔이 자리 잡게 되었다. 나의 두 자식들이 친정에 있을 때는 어머니 아버지가 정성껏 키워 주셨으니 품안에 놓고 못 보는 것이나 한이 되었는데, 이제 애들 아버지가 아들을 서울 중학교에 넣겠다고 자기 집으로 데려간 것이었다. 부모님은 키운 정도 많이 쌓이고 멀리 있는 딸을 생각해서 보내기 싫으셨지만 생부가 와서 제 자식 데려가겠다니, 그것도 더 좋은 학교에 입학시키겠다고 왔으니 못 보낸다고 하실 명목이 없으셨다. 그리하여 아들은 초등학교를 마치자 제 아버지 집에서 중학교를 다니게 되었고 딸만 친정집에 남게 되었다.
나중에 아버지 말씀을 들으니 아들은 새엄마와 문제가 있었는지 종암동에 방 한 칸 얻어 가지고 친할머니와 둘이 얼마 동안 따로 살다가 다시 아버지 집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친정집에 있을 때는 그래도 견딜 만하더니만 이제 서울에 보내고 나니 아들을 마음대로 못 만나게 될 것 같아 마음이 뒤집어져 또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다행히 방학 때는 외가에 내려올 수 있다니 좋았다. 아들은 방학을 맞아 정든 외할아버지 집에 내려오면 친구들과 함께 산과 들로 뛰어다니고 제 동생과도 잘 어울렸으며 나에게 편지를 보내주기도 했다.
방학 때마다 손자를 볼 수 있게 만든 것은 아버지의 인간적이고 현명한 처사 덕분이었다. 아버지는 애들 아빠를 늘 부드럽게 다독거렸으며 재혼한 여자가 낳은 애들까지 선물을 챙겨 보내주는 등 신경을 쓰고 계셨다. 또한 사춘기에 접어든 손자한테도 새엄마 말씀 잘 듣고 거기 있는 동생들도 잘 보살펴 주라고 누누이 일러 보내셨다.
한번은 아들 새엄마가 강경 내 친정에까지 와서 인사하고 갔노라고 했다. 아들이 방학 동안 외할아버지 집에 있다 오면 더 착해져 있다며 고마워하더라고 했다. 부모님으로부터 그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꽤 괜찮은 분인 것 같아 나도 안심이 되었고, 또 내 아들을 거둬 주는 아들 새엄마가 고마웠다. 그 여자 분도 자기 팔자인지 재취로 애들 아빠한테 시집와서 남의 자식을 키우고 있었다. 내가 남편 자식들을 키워 보니 남의 엄마 노릇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었다. 나는 내 아들이 입고 있는 은혜를 여기 있는 아이들한테 갚겠다는 마음으로 이곳 자식들을 진심으로 보살폈다.
여기 독일은 우리나라처럼 치맛바람이라는 것이 아예 없었다. 그래도 나는 꽃이나 술을 사들고 애들 선생님을 찾아다녔다.
엄마, 몬트 게쉬스트(Mond Gesicht)가 뭐야??
학교에서 돌아온 딸애가 물었다. 반 애들이 동양사람의 얼굴이 둥글넓적하다고 놀리는 소리였다.
응 그거, 네 얼굴이 보름달같이 예쁘다는 소리야.?
내 말을 들은 딸애는 예쁘다는 소리에 안심이 되는지 배시시 웃으며 제 방으로 들어갔다.
딸아이는 상냥하고 눈치도 빨라서 선생님한테 귀염을 받는데 늘 아들아이가 문제였다. 공부도 취미가 없고 하지 말아야 할 것만 골라서 하니 선생이 곱게 볼 리가 없었다. 남편도 자기 자식이지만 아들이 엉뚱한 짓을 할 때마다 못 견뎌 했다. 남편은 툭 하면 매를 들고 나섰다. 그럴 때면 기겁을 하며 남편 손에서 매를 뺏느라고 애를 먹었다.
여보, 이게 무슨 짓이에요. 자식을 매로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야비하고 상식 이하의 짓이라고요.?나는 새파랗게 질려 매를 뺏으며 남편을 달랬다. 남편은 혈압이 얼마나 올라갔는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데 아들아이는 멀쩡했다. 아들아이는 한국에서도 맞아 봤는지 매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우리 형제들은 매는 고사하고 계집애 소리도 한번 안 들어보고 자랐기에 남편 하는 짓이 나한테는 생소하고 겁이 났다. 이렇게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나면 나는 며칠씩 앓았다. 학교에서도 수업시간에 돌아다니며 친구들 머리통에 알밤을 먹인다거나 한눈을 파니 선생 눈 밖에 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내가 몇 번 만나보니까 그 선생은 외국 사람을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술을 들고 찾아가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가 기어코 일이 터지고 말았다.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데 같은 반 독일 여학생이 마늘 냄새가 난다고 아들을 놀려 댔다고 한다. 독일어는 시원찮고 화가 난 아들은 그 애를 슬쩍 밀었을 뿐인데 뒤로 벌렁 넘어져서 안 일어나니 학교 측에서 구급차를 불러 병원으로 보냈다고 한다. 아들한테 그 소식을 들은 우리 내외는 놀라서 병원으로 찾아가 보니 그 여학생은 콤모치온(뇌가 흔들린 상태)이라는 진단을 받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우리는 꽃을 사들고 그 애 부모를 찾아가 용서를 빌었는데 그분들은 우리 용서를 받아주기는커녕 욕을 하면서 독일은 가라테가 필요 없으니 코리아로 돌아가라고 소리쳤다. 그 사건으로 우리는 그 애의 팔 일 간 입원비와 구급차 사용료까지 엄청난 치료비를 물어 주게 되었다. 우리는 그 큰돈을 한번에 낼 수가 없어서 6개월 할부로 그 돈을 갚았다. 그때 혼이 나서 아이들이 사고 냈을 때 필요한 개인보험에 당장 가입했다.
6년 만의 귀국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오빠로부터 받고 긴급 휴가를 내어 부랴부랴 서둘러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눈물을 뿌리며 떠났던 김포공항에 내리는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감회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6년 만의 귀국이었다. 공항에는 오빠 언니를 비롯하여 가족이 모두 나와 있었다. 그 동안 아들은 중학교 3학년, 딸은 초등학교 6학년이 되어 있었다. 떠나기 전 초등학교에 들어간 딸은 이제 제법 소녀티가 났고 내 키만큼 훌쩍 자란 아들은 코밑이 가뭇가뭇했다. 몇 년 만에 만난 아이들은 엄마인 나를 서먹서먹해하며 내 품에 안기려 하지 않았다. 세 살 위인 아들은 그래도 ?엄마, 안녕하셨어요?? 하고 인사를 하는데 딸은 아예 엄마 소리도 하지 않고 제 막내이모 곁으로 가려고 했다.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다. 가까스로 감정을 수습한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두 아이를 억지로 끌어안았다. 부모 자식 사이도 오래 떨어져 있으니 마치 남남 같았다. 모두가 내 죄였다. 한동안 아이들한테 정신을 빼앗겼다가 주위를 둘러보니 아버지가 안 보이셨다. 불안했다. 나는 품에서 아이들을 떼어놓으며 오빠를 바라보았다.
오빠, 아버지는??
오빠는 불안해하는 내 눈빛을 보고 희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동생 걱정하지 마. 아버지는 괜찮으셔. 공항에 나오겠다고 하시는데 우리가 말렸어. 어머니 지키고 계시면 동생 데리고 오겠다고 말씀드렸어.?우리는 두 대의 차에 나눠 타고 어머니가 입원해 계시는 강남성모병원으로 갔다. 나는 병실로 뛰어들며 아버지는 제쳐놓고 침대에 누워 계신 어머니를 끌어안았다. 어머니 얼굴은 퉁퉁 부어 있어서 딴 사람 같았고 눈도 거의 감기다시피 붙어 있었다. 눈동자도 잘 안 보이는 눈 사이로 눈물이 삐죽 흘러나왔다. 하염없이 흐르는 내 눈물도 내 볼을 타고 내려 어머니 얼굴을 적셨다. 어머니 병명은 신부전증이었다.
소윤 어미야, 이만허기 다행이다. 니 엄니 하마터면 놓칠 뻔혔다. 니 형제들이 서둘렀으니 망정이지…… 급한 불은 껐으니 울지 말거라. 지난주에는 가족도 못 알아봤단다.?올케 언니가 식사를 해 나르고 오빠는 아예 어머니 침대 옆에 자면서 출퇴근도 거기서 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오빠 대신 어머니 곁에서 며칠을 보내다가 아이들을 만났다. 마침 방학 때라 아이들과 같이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제 아버지 집에서 사는 아들은 낮에 데리고 다니다가도 저녁이면 그 집으로 돌려보내야만 했다. 아들을 전철에 태워 보내고 돌아서서 울면서 신림동 고개를 넘어 오빠 집으로 왔다. 아들을 전철역에 데려다 줄 때면 언제나 오빠 셋째딸 선미가 내 손을 잡고 따라왔다. 아직 초등학생인 어린 조카딸은 ?고모, 울지 마세요. 오빠 내일 또 오잖아요? 하며 나를 위로했다. 이제는 아기 엄마가 된 그 조카딸의 따뜻한 마음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오전에 병원으로 어머니 방문을 다니고 오후에는 애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안 4주가 눈 깜작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다. 어머니 병세도 호전되어 오빠 집으로 퇴원하셔서 통원 치료를 받게 되었다. 어머니는 이제 예전처럼 얘기도 잘 하셨고 입맛을 다시 찾으셨는지 끼니마다 진지도 조금씩 드셨다.
어머니, 많이 잡숫고 빨리 기운 차리세요. 그래야 내년에 아버지와 함께 서독에 오시지.?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은 예민했다. 딸은 표정이 밝은데 아들 얼굴은 어딘지 그늘져 있었다. 혹시라도 애들이 상처받을까 봐 조심스러워 아이들과 지내는 동안 독일에 있는 막내아들 얘기는 한번도 꺼내지 않았다. 이번에 데리고 나오고 싶었지만 한국에 있는 자식들을 생각하고 제 아빠한테 맡겨 놓고 나만 나왔다. 이제 이틀만 자면 또 애들과 작별할 것을 생각하니 걸핏하면 눈물이 쏟아지고 잠이 안 왔다.
출국 하루를 앞두고 나는 이불 속에서 나올 수가 없었다. 감기몸살인지 열이 39도를 오르내렸다. 독일에 있는 남편한테 전화를 했다. 열이 많아 예정일에 도저히 떠날 수 없겠다고. 전화를 받은 남편은 펄쩍 뛰었다. 비행기에 누워서라도 꼭 와야 한다고, 춘웅이가 날마다 달력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엄마를 기다린다고 꼭 오라고 사정했다. 남편은 내가 오기 싫어 아프다고 하는 줄 아는지 겁을 잔뜩 먹고 있었다. 말리는 가족들을 뿌리치고 기어코 가겠다고 하니까 아버지는 두툼한 내복을 한 벌 사오셨다.
비행기까지 걸어갈 기운도 없어 승무원이 휠체어에 나를 실어다 비행기에 태워 줬다. 비행기 안에서도 비즈니스 좌석에 누워서 왔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내리니 남편은 애들을 앞세우고 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은 내가 좋아하는 흰 국화를 한 아름 안고 있었다.
시어머님을 독일에 모시고
남편이 직장을 가진 후 우리 생활도 차차 안정되어 갔다. 우리는 부모님이 더 늙으시기 전에 독일에 모시기로 의견을 모았다. 먼저 김제 청하에 계시는 시부모님을 초청하기로 하였다. 지금은 여행이 자유화되어 여권만 내면 쉽게 외국에 나갈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외국에 나가려면 반드시 초청장이 있어야만 했다. 우리는 초청장을 만들어 한국으로 보냈다. 그러나 시아버님은 아흔이 다 된 어머니(나에게는 시할머니)를 두고 떠날 수 없으니 시어머니만 가실 거라고 연락을 하셨다. 다른 형제들도 있으니 한 달 정도 집을 비워도 되는데 아무리 오시라고 권해도 거절하셨다. 시아버님은 차남이시지만 형님을 제쳐놓고 어머니를 모시는 효자셨다. 초청장이 가고 몇 주가 지나 시어머님이 독일에 오시는 날이었다.
서둘러서 공항에 나간 우리는 어머님이 타고 오시는 대한항공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영어도 물론 모르시고 처음 나선 외국 나들이인데 잘 찾아오시려나 무척 걱정이 되었다. 유럽의 관문인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 청사 안은 언제나 소란하고 복잡했다. 비행기 도착을 확인하려고 남편은 모니터에 계속 붙어 서서 떠날 줄을 몰랐다.
여보, 대한항공이 방금 도착했어!?
남편 목소리는 흥분되어 떨렸다. 우리는 아이들을 데리고 출구로 우르르 몰려갔다. 문이 열릴 때마다 몇 사람씩 밖으로 나와 어디론가 가버렸다. 우리는 문이 열릴 때마다 고개를 길게 뺐다.
엄마, 춘웅이가 없어졌어!?
나 역시 출구에만 정신을 쏟고 있는데 딸아이가 소리쳤다.
어디서 놀고 있겠지. 잘 찾아봐, 현아.?
화장실까지 가 봤는데도 없단 말이야.?
딸아이는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이었다.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이 복잡한 공항 대합실에서 세 살도 안 된 어린 아들을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앞이 캄캄해져 시어머니 오시는 것도 까맣게 잊어버릴 뻔했다. 당황한 남편도 내 곁으로 달려왔다.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 보니 이렇게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시어머님이 나오시면 이번에는 시어머님이 미아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당신은 출구로 가서 어머님 기다리세요. 나는 애들 데리고 춘웅이를 찾아보겠어요.?조금 더 찾아보다가 못 찾으면 방송국에 안내 방송을 부탁하려고 했다. 그때 남편이 크게 소리쳤다.
여보, 빨리 와. 춘웅이 찾았어!?
달려가 보니 출구 저 안쪽에서 아들이 아장아장 이쪽을 향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어떻게 저 안에서 나오는지 생각해 봤더니 출입문이 자동으로 열릴 때 호기심에 그 안으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공항 대합실의 승객이 나오는 출구는 자동인데 안에서는 열리고 밖에서는 안 열리게 되어 있다.
아들을 찾고 얼마 안 있어 시어머님이 커다란 가방을 끌고 씩씩하게 걸어 나오시는 모습이 열린 문 저 안쪽으로 보였다. 시어머님은 체격도 좋으시고 활달하신 성품에 통도 대통이시다. 몇 년 만에 뵙는데 예전에 비해 별로 늙으신 것 같지 않아서 무척 기뻤다. 남편은 어머니 손을 모아 잡고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어머님도 어지간한 남자보다 더 대범하신 분이시지만 눈가가 촉촉이 젖어 있었다. 남편도 늙어 가는 나이지만 어머님 눈에는 여전히 어린애로 보이시는가 보다. 어머니보다 더 큰 가방을 트렁크에 싣고 어머님을 앞자리에 모시고 온 가족이 다 타니 차가 비좁았다.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시어머님은 청하산에서 이 홍이쁜(시어머님 성함)이가 제일 먼저 비행기 타고 외국 나왔다며 흐뭇해하셨다. 지금 연세에도 여전히 고우신 시어머님은 어려서부터 너무 예뻐서 부모님이 이름을 이쁜이라고 지어 줬다고 말씀하셨다.
남편은 운전대를 잡고 기분이 좋아서 노래까지 흥얼거렸다.
어머님에 소느을 노오코 돌아아 스을~때에 부어엉 새에도 울어었~다오…….?남편이 어머니가 그리울 때면 늘 부르던 노래였다. 남편은 어머님과 정이 더 많은지 평소 때도 아버지 얘기보다 어머니 얘기를 더 많이 했다.
시어머님이 와 계시는 집 며느리들은 여러모로 불편해 죽겠다고 하는데 나는 어머님이 오신 뒤로 더 편해졌다. 이해심이 많은 어머님은 내가 일하고 돌아오면 얼마나 힘드냐고 하시며 침대에 가서 좀 쉬라고 하셨고 아이들을 설거지하라고 부엌으로 내보내셨다. 남편한테도 집안 청소도 시키고 내가 부엌에서 요리하고 있으면 어미 힘들다고 어서 나가서 도와주라고 부엌으로 아들을 내몰았다.
한국에 있는 느덜 사촌들은 청소하고 부엌일을 모다 하는디, 다 큰 것들이 먹고 놀기만 혀!?여느 날도 안 하던 청소나 설거지를 하라고 성화를 하니 처음에는 할머니가 와 계신 것을 좋아했지만 얼마가 지나자 아이들은 할머니를 싫어하기 시작했다.
어머님, 애들한테 너무 그렇게 하지 마세요. 지금은 옛날하고 달라요. 애들도 저희들 나름대로 스트레스가 많아요.?오래간만에 보는 귀여운 손자들에게 어머님이 왜 저러시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아이들 친엄마가 아니니 며느리인 내 눈치가 보이셨을 것이다. 시어머님은 보통 영리한 분이 아니셨다. 반대로 아이들을 싸고 도셨다면 내 반응이 어떠했을까?어머님은 내가 돌아오면 부엌에 가셔서 술잔 두 개와 안주를 손수 찾아 들고 나오셨다.
얘 어미야, 우리 한잔씩 할까??
내가 미리 알고 챙겨 드려야 했는데, 민망할 때가 많았다. 술을 아껴서가 아니라 손님이 오시거나 특별한 일이 없으면 대낮부터 술대접하는 것을 생각하지 못해서였다. 나는 친정에서도 술을 좋아하시는 아버지 덕분에 술을 조금씩 마셨고, 또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술 마실 기회가 많이 있었다. 술을 마실 줄 아는 나지만 대낮부터 마시는 것은 습관이 안 되어 좀 어색했다. 하여간 난 술복이 많은 것 같다. 친정에서는 아버지와 대작하는데, 이제 시어머님과 대작하게 되었으니까.
예, 어머님. 그럴까요??
얼른 어머님이 즐겨 드시는 위스키 병을 들고 나왔다. 어느 날은 술이 마시고 싶지 않아도 어머니와 대작을 해야 할 때가 있었다. 싫다고 말씀드리면 어머님이 무안해하실까 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럴 때는 대낮부터 얼굴이 홍시처럼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남편과 파라과이까지 가서 같이 고생한 남편 친구는 지금 뒤셀도르프에 살고 있는데 남편 대신에 어머님을 모시고 파리에 다녀왔다. 애들 방학 때는 어머님을 모시고 남부 독일 바이에른 지방에 가서 그림같이 아름다운 도나우 강물 위에서 배도 태워 드렸다. 주말이면 김밥을 싸 가지고 로렐라이도 구경시켜 드리고 아름다운 라인 강가에 나가 산책도 하면서 어머님께 잘해 드리려고 노력하는 동안 3개월 반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해심 많으시고 인정이 넘치시는 어머님과 정이 들었다. 딸같이 따뜻하게 대해 주시는 어머님과 함께 한 시간들이 너무 빨리 지나가 버려 떠나실 때가 되니 아쉬움이 많았다.
내가 아는 어느 집은 시어머니 오신 뒤로 남편과 너무 싸워서 시어머니가 빨리 가셨으면 좋겠다며 지겨워했다. 독일 오신 시어머니들이 며느리한테 점수를 못 따는 첫째 원인은 아들이 부엌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하시기 때문이었다. 또 며느리를 제쳐놓고 아들만 데리고 쑤군거리시는 것도 며느리들은 싫어했다. 독일은 맞벌이 부부가 대부분이어서 아내가 근무 가고 없으면 남편이 집안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시어머니들은 아들이 부엌일을 하면 불알 달린 사내가 부엌에 들랑거린다고 아주 싫어하셨다. 내 딸이 남의 집 며느리가 되고 내 아들이 남의 집 사위가 되는데 어째서 아들이 부엌에 들어가는 것은 보기 싫고 사위가 부엌에 들어가면 사랑스럽게 보일까? 우리 어머니들의 못 말리는 이기심을 버리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가? 독일에 있는 한국 교민들 사이에 두고 쓰는 말이 하나 있다. 아들집에 오신 시어머니는 가실 때 싸우고 가시고 딸네에 오신 장모는 웃고 가신다고. 나는 앞뒤가 툭 트이고 인정 많으신 시어머님 덕분에 공항에서 울며 헤어질 수 있었으니 다행이었다.
어머님을 배웅하러 공항에 나온 남편 친구가 우리를 보고 예외라는 듯 놀렸다.
나 원, 시어머니와 눈물로 작별하는 며느리는 첨 봤네.?시어머님과 공항에서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남편이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여보, 고마워. 그 동안 수고했어. 어머니도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가셨어. 한국에서 비행기 타실 때 이런 걱정을 하셨대. 나는 자식이 많아 늘 속 썩는 일이 많으니 서독에 가도 어쩌면 좋은 꼴 못 보지 하는 생각을 갖고 오셨대. 그런데 직접 와 보니 그게 아니더라고 내게 말씀하셨어.??와서 보니 어미 같은 사람 더라. 지미(제 엄마) 밑에 있으면 그보다 더 기피고 편허것냐, 내 눈으로 모다 보고 가니 이제 죽어도 원 다?고 떠나시기 전 공항에서 말씀하셨다고 한다. 아마 시어머님은 우리를 만나기 전까지 고전에 나오는 장화 홍련의 계모를 상상하고 계셨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들한테 특별히 잘해 주는 것도 없는데 남편 얘기를 듣고 나니 부끄러웠다. 내 천성이 꾸미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여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인데…… 한 가지 신경 쓴 것이 있다면 아이들 가슴에 못 박는 일은 절대 하지 않겠노라고 아이들을 만나던 첫날 나 자신과 약속한 것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어른들은 서운한 일이나 억울한 일이 있다 해도 다시 화해하고 풀지만 아이들한테는 어려서 입은 상처가 평생 가슴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이들을 키우며 열 번 다 잘하려고 하지 않고 한 번 뼈 맺힌 일은 절대 안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같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같이 낳은 자식을 키우면서도 싸울 때가 있는데 하물며 우리 집 같은 처지는 부부가 서로 노력하지 않으면 가정을 유지해 나가기가 힘들었다. 딸아이는 선생님한테도 귀염받고 착하고 상냥하며 학교 공부도 잘 따라가서 속 썩을 일이 없는데 아들녀석은 가끔씩 집안을 뒤집어놓았다. 아들녀석은 소소한 거짓말도 잘하고 공부에도 취미가 없었다. 선생 눈 밖에 나서 툭하면 우리는 학교로 불려 가기 일쑤였다. 선생은 아이를 더 이상 못 데리고 있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럴 때마다 우리 부부는 아이가 사춘기여서 적응하기가 힘들어서 그러니 한 번만 봐 달라고 사정을 해야 했다. 이런 상황을 나보다 더 못 견뎌 하는 이는 남편이었다. 남편은 아들 문제로 학교에 다녀온 날은 벌겋게 핏대 세운 얼굴로 여권을 가지고 나와 한국으로 다시 보내자고 난리였다.
여보, 힘들어도 그런 생각은 하지 마. 자식이 무슨 물건인가 데려왔다 보냈다 하게. 한번 데려왔으면 끝을 봐야지. 애들 왔다 갔다 하면 불량아밖에 더 되겠어.?남편은 아들이 문제를 만들 때마다 죄도 없는 딸아이까지 싸잡아서 한국으로 보내겠다고 여권을 꺼내 들고 난리였다. 그때마다 나는 남편의 손에서 여권을 억지로 빼앗아 감추곤 했다. 그 불난리 속에서 나라고 속이 편할 리가 없었다. 같이 낳은 자식도 아닌데 남편은 속으로 얼마나 나한테 미안하고 더 불편하랴 생각하니 남편이 안돼서 오히려 다독여야만 할 때가 많았다. 다른 한편으로 속상한 일이 생길 때면 나는 한국에 있는 내 자식들을 생각했다. 그러면 부글거리던 속이 가라앉고 마음의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처음 두 아이만 데리고 있을 때하고는 달리 막내아들이 태어난 후로는 내 아들과 피를 나눈 형제다 생각하니 이제 남이라는 생각도 사라졌다.
석 달이 멀다 하고 집안이 뒤집어지지만 아이들이 항상 미운 짓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천성이 착한 딸아이는 자라면서 내 품을 파고들며 많은 정과 기쁨을 안겨 주었고 아들아이도 밥상에서 먹을 만한 반찬을 내 앞으로 밀어 주는 등 차차 철이 들면서 나를 생각해 주었다. 생각해 보면 어른들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남의 엄마를 엄마라 부르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아이들이 어쩌면 어른들보다 더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참으로 남의 엄마 노릇도, 남의 자식 노릇도 서로가 어려운 길이었다. 각오하고 시작한 재혼이지만 남편도 나도 가정을 지키기 위해 많은 사랑과 인내를 필요로 했다.
고마운 것은 두 아이들은 내가 낳은 막둥이를 끔찍하게 여겼고 막내아들도 제 형과 누나를 잘 따랐다. 늦게 낳은 아들은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보이지 않는 평화의 다리 역할을 하기도 했다. 아무리 우리가 참고 인내한다고 해도 우리 둘 사이에 태어난, 계룡산 보살이 일찍이 예언했던 만득자인 막내아들이 없었다면 파국을 맞이했을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독일에 오신 부모님
시어머님이 다녀가시고 이 년 뒤인 1985년 봄, 이번에는 친정 부모님을 독일에 모셨다. 나는 엄두도 못 내고 있는데 친정 부모님을 모시자고 한 것은 남편이었다. 모시고 싶은 마음이야 내가 더 굴뚝같았지만 아직 그럴 처지가 아니어서 절대 반대했다. 왜냐하면 시어머님이 다녀가신 후 저축해 놓은 돈도 없었고 생활도 빠듯해 부모님을 초청할 여유가 우리에게 없었다. 그 당시 내 봉급이 2,000마르크가 안 되는데 비행기 요금이 한 사람당 1마르크도 빠지지 않는 3,000마르크나 되었다. 두 분 비행기 요금만 해도 6,000마르크나 된다. 아무리 부모님이 보고 싶어도 그런 거금이 나올 데가 없었다.
가지고 있는 돈도 없는데 어떻게 부모님을 오시게 해요???부모님은 자꾸 늙어 가시는데 언제 우리가 돈 모아 놓고 부모님을 모시겠어. 조금이라도 근력 있을 때 오시게 해야지. 돈 모아 놓은 다음에 부모님 초청하려면 그때는 너무 늙어서 못 오시게 될지도 몰라.??그건 당신 말이 옳지만 그래도 그렇지 뭐 가지고 비행기 티켓을 사??돈 나올 구멍이 아무 데도 없는데 남편은 무얼 믿고 저런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담배 한 개비를 빼물고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던 남편이 입을 열었다.
여보, 우리 이렇게 하면 어떨까? 은행에서 2만 마르크를 융자받고, 2년 상환으로 갚으면 다달이 얼마 안 들어가도 된대. 내가 은행에 가서 다 알아봤어.??아니 여보, 융자를 받아요. 당신 돌았어? 어머니 아버지가 독일에 초청해 달라고 조르시는 것도 아닌데 은행 융자까지 받아서 하자고요? 난 싫어요.?남편의 융자받자는 말에 나는 펄쩍 뛰었다.
여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모든 건 다 때가 있는 거라고. 부모님 더 늙으시면 오고 싶어도 못 오신다구. 지금이 제일 좋은 시기야.?당시 부모님 연세가 70대 중반이셨으니 어쩌면 남편 말이 일리가 있기는 했다. 남편이 저녁마다 끈질기게 설득하니 내 마음도 차차 남편 의사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리하여 우리는 은행에 가서 2만 마르크를 융자받아 가지고 어머니 아버지를 초청하게 되었다.
여보, 나 소원이 하나 있어.?
뭔데 말해 봐. 당신 소원이면 다 들어줄게.?
아버지 여기 오시면 맛있는 술 많이 많이 사드리고 싶어. 우리 아버진 없는 살림에 딸들까지 가르치느라고 좋아하시는 술도 맘껏 못 드셨거든.??아이고, 겨우 고거? 소원 한번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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