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륵-. 사파이어로 치장된 고풍스러운 검집 안에서 푸른 광택에 적시어진 검이 창가를 통해서 부서지는 여명의 빛과, 호화스러운 저택을 비추고 있는 샹들리의 금빛 광휘를 반사시키며 모습을 드러냈다. 아름답고도 섬세한 선이 길게 뻗어있는 검날이 무색(無色)빛을 번뜩이며 휘둘러면 공기마저도 찢어버릴 것 같았다. 그만큼 날카로운 라인을 가진 검이었다.
“……어서 죽여주십시오.”
“그럴까.”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춘 채, 당당한 목소리로 말하는 금발의 소녀에게 검을 쥐고 있던 보랏빛 소년은 아무런 미동도 없이 짧게 대답했다. 흠칫하는 소녀의 표정에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소년은 빠른 발도로 검을 소녀의 목줄기에 갖다 대었다. 소년의 초색(草色) 동공에서 거침없이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에 무릎을 꿇고 있던 소녀는 관자놀이에 흐르는 땀줄기를 닦아내야 할 손가락의 움직임 마저도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소년을 앞에 두고 있노라면…….
“네 목은 잘 보관하지.”
입고리를 들어올리며 내뱉듯이 말한 소년은 곧, 검을 내세웠다. 엄습하는 두려움과 함께, 사안을 가득히 메우는 검의 광택에 소녀는 눈을 질근 감았다. ‘난 이제 자유롭다. 이승에서의 삶을 잃었지만, 더 많은것을 얻을 것이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몇번이고 그렇게 되씹었다. 감긴 눈커플 사이로 흘러내리는 깨끗한 성수(聖水)가 뺨을 타고 흘러내리며 곧 뚝, 하고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소년이 치켜 든 검이 허공을 가르며 휘둘러지는 순간!
“잠깐만!!”
발악하듯 소리치는 소녀의 외침소리에 소년은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멈칫했다. 저택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모인 이 곳에서 소년은 얼굴이 붉어짐을 느꼈다.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 자체가 자신에게는 더 없는 창피스러움이었기에.
“나, 난 죽기 싫어요!!”
어이없는 소녀의 말에, 소년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미간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검을 쥔 손을 부르르 떨고 있던 소년은 결국 입밖으로 욕지기를 내뱉었다.
“빨리 죽여달라고 한것은 너였다. 빌어먹을 년.”
방금 전까지 마음속으로 몇번이고 되씹었던 말들은 그녀의 뇌리에서 소멸된지 오래였다. 감긴 눈커플 사이로 흐릿하게 보이는 것은 다름아닌 사후세계. 하지만, 살기위해 내지른 외침소리도 죽음을 무마시키진 못했다.
“…이제 죽어라.”
속삭이듯 작게 중얼거리며, 소년은 다시 검을 휘둘렀다. 자신의 다리를 붙잡으며 눈물을 떨어뜨리는 소녀의 가느다란 목줄기를 향해.
'치익-'
인육을 찢어버리는 열음(裂音)이 귓전을 때렸다. 무거운 무언가와 바닥이 마찰하는 소리가 열음이 지나간 자리를 다시 채웠다. 머리와 몸이 두동강된 채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것은 이제, 사람이 아니었다. 식은 고깃덩어리일 뿐.
* * *
“유시님의 선혈입니다.”
어둠속에서 울려 퍼지는 걸걸한 목소리에, 고심에 젖어 있던 중년의 남자가 반응한다. 그는 백발의 노인이 건네는 붉은 액체가 담긴 병을 받아 들고는 쓰디 쓴 웃음을 입에 걸었다.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자아낸 억지 웃음을.
“이제 다시 태어날 차례인가.”
“……괜찮으십니까.”
노인의 눈동자 위로 안타까움이 짙게 흘러내린다. 남자의 투박한 피부위를 적시는 눈물이 어둠속에서 빛난다. 하지만,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닦아내었다. 하지만, 또 다시 흘러내리는 눈물줄기. 감추지 못할 슬픔이었다.
“운명에 순응해야지. 이게 그 분의 뜻이라면…….”
그는 말끝을 흐렸다. 감당하지 못할 슬픔이 울컥하며 올라왔지만, 힘겹게 눌러담았다. 끅끅 거리며 눈물을 토해내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30여년 동안 쌓아온 자신에 대한 인지도와 위엄을 고작 한 여자 때문에 무너뜨릴 수 없어서 일까.
“성 안에 있는 사티로스들을 ‘환생실’로 집합 시켜라. 곧 식을 거행한다.”
사내의 말에 노인은 고개를 숙이며 물러갔고, 말을 끝마친 그는 하체를 일으켜 세웠다. 창가로 들어오는 비나룬에 그의 얼굴선이 드러난다. 섬세한 얼굴선으로 정돈된 턱수염, 흑빛 장발에 옥색 눈동자.
……그리고, 네개의 다리.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