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한 인간” 사도행전 16:1-5
오늘 본문은 바울이 디모데를 초대교회의 젊은 지도자로 세운 이야기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가 교회 안의 이방인들을 위하여 제정한 법규를 전달할 책임을 지고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이 법규는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되어 있는 예루살렘 회의에서 결정한 것입니다. 이 회의는 교회가 이방인을 받아들이기 위한 조건을 제정한 교회 지도자들의 회의였습니다. 이 회의에서는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게 하고 율법을 지키도록 해야 한다는 일부 지도자들의 강경한 의견을 부결하고 “다만 우상과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는 법을 제정하고 교회들에게 편지를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각 교회들에게 이 결정을 전할 편지를 가지고 여행을 떠나게 된 바울과 바나바는 의견 충돌을 일으켜 함께 가지를 못하고 갈라서게 됩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를 타고 떠났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육로로 소아시아 지역의 도시들을 향해 떠났습니다.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 지역에 도착해서 디모데라는 청년을 만나게 됩니다. 디모데는 유대인인 어머니와 헬라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할례는 유대인 남자아이가 난 지 8일 만에 받는 의식입니다. 당시에 이방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유대인 사회에서 사람취급조차 받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청년이 된 디모데가 할례를 받도록 한 후에 전도자의 대열에 합류하게 만들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으로 취급받던 디모데를 유대인으로 인정받도록 만든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일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왜 바울이 이런 일을 했을지 많은 생각을 하고 의문을 가지게 만듭니다. 바울이 “나는 유대인에게 전도하기 위해서 유대인처럼 되었고, 이방인에게 전도하기 위하여 이방인처럼 되었었다” 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청년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도록 만든 것이 디모데가 유대인에게 전도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한 바울의 자유로운 행위였다고, 혹은 교회를 위한 바울의 융통성 있는 결단이었다고 변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편 갈라디아서 2장에서 바울은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유대인들을 의식하여 자리를 피한 베드로를 힐난한 적이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바울의 신학적 확신입니다. 더구나 디모데를 만난 바로 그 시점에 바울은 그 사실을 공표하는 편지를 전하기 위해서 이방인 교회들을 방문하러 길을 떠나려던 중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게 한 바울의 결정은 어떤 문제에 대하여 확신에 이르기 전에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이 겪을 수밖에 없는 혼란의 상태였거나, 확신은 있지만 순간적으로 저지른 실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 일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았던 바울의 부끄러운 일면을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기록해놓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누가는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들었을 만큼 훌륭한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이었던 바울과 바나바가 바로 그 안디옥에서 서로 심하게 싸워서 갈라 설 수밖에 없었던 일도 기록으로 남겨 놓고 있습니다.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게 한 일이 바울의 실수이고 그의 불완전함을 나타내는 사건이라면 구태여 누가는 왜 그 사실을 기록했을까 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특히 흑백 논리에 익숙해 있는 우리 한국인들에게 바울같이 위대한 인물이 실수를 했다는 사실은 받아들여지기 힘들 것입니다. 흠이 없고 완벽한 존재여야만 존경의 대상이 되고, 지도자가 실수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여기는 한국인들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어떤 결정을 해도 만장일치이기를 바라고 싸우는 것은 보기 흉하고 좋지 않은 것이니 이유가 무엇이든 무조건 싸우지 말기를 바랍니다. 다시 말하면 한국인은 인간의 불완전함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결국 한국인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신이 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요구합니다. 따라서 사람을 속이는 일에 능숙해야만 성공한 지도자라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불완전한 자신을 완전한 것처럼 보이게 하려면 사람들을 속이는 길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정치가만이 아닙니다. 종교계, 문화계, 학계, 예술계, 연예계, 심지어 경제계 할 것 없이 모든 분야에서 그러합니다. 예로서 대중 앞에 서야하는 연예인들은 스트레스를 견디기 위해서 약물을 복용하기 쉽고, 사업을 하는 사람이란 항상 실패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업에 투자한 것이 손실이 날 수도 있고, 사업체를 살리기 위해서 빚을 질 수도 있고 진 빚을 못 갚을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업가는 사업에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온갖 수단방법을 동원하게 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약물을 복용한 연예인이나 사업에 실패한 사람은 감옥에 가거나 자살로 내몰립니다.
인간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는 무서운 재앙에 이르게 됩니다. 인간을 신이 되라고 요구하는 사회는 악마의 지배를 받는 사회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북한 사회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북한은 인간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지상 천국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한 치의 실수도 없는 태양과 같은 왕인 김 씨가 다스리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의 국민 역시 실수란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할당 받은 업무는 정해진 기간 안에 완벽하게 수행해야만 합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신도 악마도 아닌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인간의 불완전함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의 개입을 차단하려는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는데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시작됩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만들어 내는 실수와 실패, 그로 인한 좌절과 절망을 통해서 인간은 절대자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맡길 수 있습니다. 역사는 인간의 실수와 하나님의 은혜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죄와 실수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해내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 삶의 현장임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한 목적은 사도 바울을 비롯한 초대교회 지도자들이나 성도들의 위대함을 전하려는 것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사건들 속에서 일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전하하려는 것입니다. 누가는 인간의 약함과 실수들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전하고 싶어서 사도행전을 기록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오늘 우리에게도, 한국 사회에도 역사하시기를 원합니다. 5/1/16 한영숙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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