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라” (누가복음 10:25-37)
인간은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고 그 의미를 찾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공허하다고 느낄 수 있고 무의미하다고 절망할 수 있으며,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려워도 목적이 있고 뜻이 있으면 만족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 나온 율법사는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한 삶을 사는 것인지를 알기 원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질문한 율법사에게 예수께서는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라” 고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신명기 30장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 지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어떤 것이 없어야 합니다. 실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찾아온 율법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게을리 한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그의 생활이었으며, 율법을 지키는 데 익숙해 있는 그에게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율법사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는 문제가 없는데, 이웃이 누구인지를 몰라서 문제라는 식입니다. 그는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질문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여리고로 가는 길에서 강도를 만나 쓰러져 있던 사람을 도와준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비유로 말씀하신 후에 “너도 가서 그렇게 하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묻던 율법사에게, 다른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이웃을 알아야 이웃을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반문하면서 사랑하기를 거부했던 율법사에게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실례를 들어 설명해주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주는 비유입니다. 유대인이었던 율법사는, 그가 사랑해야할 이웃은 당연히 그의 동족인 유대인에 한정된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 의하면 사랑해야 할 이웃은 자기 나라 사람인 유대인에 국한 된 것이 아닙니다. 길가는 행인에게, 강도를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사랑해야 할 이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이웃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둘째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제사장이나 레위인 같은 특별한 사람들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도덕적이라고 멸시를 받던 사마리아인과 같은 사람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끝으로, 사랑하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아니라, 지극히 상식적이고 간단하고 쉬운 일입니다. 길 가다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도와주는 것과 같이 너무도 자명한 일이 사랑하는 일이라고 비유는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 그러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는 일 역시 분명하고 알기 쉬운 일입니다. 문제는 분명하고 간단한 이 일을 실행에 옮길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특별히 악해서가 아니라, 쓰러져 있는 사람을 도와 줄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갈 길이 바빴을 수도 있고, 직책상 도와 줄 수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들 자신만이 아는 피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요즘은 이 비유에 나오는 것과 같은 상황조차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길을 가다가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하면 구태여 차에 태워 숙소로 데리고 갈 필요가 없습니다. 전화 한 통화면 경찰이 와서 앰뷸런스로 실어 갑니다. 경찰에게 전화 한 통화 해 주는 것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셈입니다. 발전된 사회일수록 한 개인이 다른 개인을 위해서 무엇을 할 필요가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제도와 조직이 담당하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은 제도와 조직에 그 책임을 떠맡김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지 않고서도,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현대인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기억조차 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되어있습니다. 이웃을 필요로 하지 않는 현대인은 한결 평화롭고 자유로울 것 같습니다. 이웃을 사랑해야할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고, 또 나를 사랑해 줄 구체적인 이웃이 없어도 상관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이웃집에 누가 사는지 얼굴 한번 마주치지 않고도 얼마든지 살아 갈 수가 있습니다. 구태여 이웃을 알려고 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내가 어려울 때 이웃집 사람들이 도와 줄 것도 아니고, 또 그 사람들을 내가 도와 줄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는 현대인은 점점 외톨이가 되어갑니다. 심지어 가족들 사이에서도 이런 식의 고립 현상은 뚜렷합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이이들은 아이들대로, 제각기 자기의 일이 있습니다. 하루종일 자기 일에 몰두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집에 들어오면 TV 나 컴퓨터 앞에 앉아서 또 혼자만의 시간을 가집니다. 이처럼 고립되어, 제각기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말을 걸고 도와주려고 한다면, 그 사람이 오히려 우스운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농경사회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실감하며 살았지만, 현대인들에게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허상에 불과하고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어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력을 잃어버렸고, 하나님께 드려져야할 예배가 예배하는 사람들이 즐기기 위한 놀이처럼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해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이웃도 없이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이 얼마나 공허하고 외로울 것인지 짐작이 가십니까? 인간이 홀로 결단하고, 스스로 책임지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달픈지 아십니까? 사랑할 대상이 없는 삶이 얼마나 삭막한지 아십니까? 그 때문에 현대인은 까닭을 모르는 불안에 사로잡히고, 스트레스와 우울증 같은 이상한 병에 시달립니다.
하나님도, 이웃의 존재도 부정하며,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세상에는 희망이 없고 생명이 없습니다. 이러한 절망과 죽음에 처한 세상(secular world)과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세상이 땅 위에 존재합니다. 그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입니다. 모래알처럼 흩어지기를 원하는 현대인들 속에서도, 차가운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오늘 이 시대에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기 원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자기를 희생하고,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로, 교회로, 이 땅 위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현대 문명의 극치에 달해 있는 맨하탄 한복판에도 교회가 존재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곳에 사랑의 공동체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도, 로봇이 다스리는 세상이 온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사랑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을 통해서만 인간은 참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목마른 사람이 갈증을 면하고, 지친 영혼이 시원한 그늘에서 쉴 수 있는 사랑의 공동체가 존재해야 합니다. 교회는 그렇게 이 땅에 존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나를 사랑해 달라’고 요구하기 전에, 사랑을 받으려 하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인지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더 잘 아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의 공동체의 증인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7/18/10 한영숙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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